[한 장면] 안쓰럽다고요? 금방 팔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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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출판사 제공

지난해 이맘때 강원도 삼척 호산장에서 소설가이자 사진가인 정영신이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는 신문지 두어 장 깔고, 호박 한 덩이, 마늘 몇 쪽만으로 전을 폈다. 뙤약볕을 막아주는 양산 하나 들고 호박 임자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언제 호박이 팔려 자리를 털고 일어설지 모르지만, 용케 그걸 다 팔아도 몇천 원 손에 쥘 수 있을까? 호박 한 덩이 팔아서 빨랫비누 한 장 살 수 있을까? 집 담장에 심었음 직한 호박 한 덩이 갖고 나와 텅 빈 장터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쇠락해 가는 장터 풍경을 웅변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시골 장터엔 장꾼이 아닌데도 이 할머니처럼 손수 산에서 캔 약초나 농사지은 오이 몇 개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약초 판 돈으로 저녁상에 올릴 간고등어 한 손 사기도 하고, 집에서 기른 닭 한 마리 판 돈으로 손주 운동화 한 켤레 사기도 한다. 생산자와 판매자의 구별이 사라지는 곳도 장터다. 인심이 예전 같지 않지만, 난전을 펼쳐 놓고 장 구경을 다녀도 주인 없는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는 곳이 시골 장터다. 

한국의 장터 / 정영신
'한국의 장터'는 1987년부터 25년 동안 전국의 시골 장터를 기록해 온 정영신의 사진 430여 장과 글을 담았다. 전국 팔도의 대표 오일장 82곳의 장터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문학적 자료집이기도 하다.

 정영신의 사진과 글에는 장터 풍경이 날것으로 살아 있다. 약초 몇 뿌리 배낭에 넣고 산골 마을에서 온 노부부, 새벽부터 한복을 차려입고 와서 장이 파할 때까지 사람 구경하고 돌아가는 할아버지, 봄에는 분무기를 고치고 여름엔 장화를 수선하며 30년 넘게 장터를 지킨 '맥가이버 할아버지', 밭에 심은 달래와 부추를 뜯어와 팔면서 백 살까지만 장사하겠다는 아흔한 살의 할머니….

정영신은 발품 팔아 몇 번이나 갔던 장터를 다시 가면서 스스럼없이 장터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하긴 익명의 고객만 존재하는 대형할인점과 달리 시골 장터는 배추 한 단 사고팔더라도 말이 오가는 공간이다. 장터를 지키는 사람이 나이 들수록 장터도 점차 쇠락하는 게 마음 아프긴 하지만.

정영신의 말을 빌리면 장터는 '두꺼운 책처럼 펼쳐 보면 지혜가 들어 있는 말하는 박물관'이다. 정영신 글·사진/눈빛출판사/480쪽/2만 9천 원. 이상헌 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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