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⑦ 정수장학회 문제 해결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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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에게 억울하게 언론 3사와 부일장학회 기본재산인 토지 10만평을 강탈당한 김지태 사장은 풀려난 직후부터 강력하게 재산반환을 요구했다.

이 사실은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작성한 문서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1962년 6월 22일 풀려난 김지태는 경제기획원장관 김유택을 다그쳐 "재산헌납은 선의의 기증행위가 아니라 강제로 약탈된 행위로 반환방법을 고려하겠다"는 말을 받아냈다. 이를 근거로 김지태는 주변에 "군정에서는 나의 재산을 강취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반환 계획을 연구하고 있다", "강제로 헌납된 재산이 자신에게 반환되지 않는 한 군인은 역사적으로 영구히 규탄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정보부와 경찰이 작성한 김지태 사찰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해 발간정지는 상징적 사건
부산일보 독립성 실현 방안 찾아야


이 해 9월 김지태가 작성한 자필 비망록을 보면 군사정권은 부산일보 주식을 빼앗기고 사장자리에서도 쫓겨난 김지태에게 부산일보가 고속 윤전기를 도입하려 하면서 신축공사 중이던 사옥의 공사를 마무리해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김지태는 이에 대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 직후 5·16장학회는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해 간 것이 문제로 불거질까 우려하여 김지태에게 5·16장학회 이사직을 제의했으나 김지태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김지태는 역으로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을 5·16장학회에서 분리하여 자신이 운영할 수 있도록 할 것, 자신이 이들 언론 3사의 주식 51%를 보유할 수 있게 할 것, 언론 3사의 주식 49%를 넘겨준 대가로 서울신문사를 불하해 주도록 요구한 바 있다.

1971년 7월 5·16장학회가 경영난에 빠져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매각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자 김지태는 5·16장학회 이사장 김현철에게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 "사회의 공기인 언론 사업체를 상품처럼 방매한다는 비난의 여론"을 환기시키며 5·16장학회가 두 언론사를 매각하려 한다면 제3자가 아닌 창업자인 자신이 인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 김지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1962년 5월 강탈해 간 재산을 조속히 반환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반환청구서>를 5·16장학회에 보내 문서로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때 공화당 총재를 맡은 김종필도 자신이 집권하면 박정희가 강탈해 간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김지태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김지태는 유신정권의 붕괴로 반짝 재산 반환의 꿈을 키웠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82년 4월 9일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6월 항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을 떼면서 언론민주화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부산일보 노동조합은 1988년 7월 강력한 파업을 벌여 편집국장 추천제를 쟁취했다. 기자 조합원들의 투표가 편집국장 후보 3인을 추천하는 제도로 낙하산 사장이 편집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였다. 실제로 사측에서는 추천된 편집국장 후보 3인 중 최대 득표자를 임명, 내용적으로는 편집국장 직선제와 다름없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군사정권의 부산일보 등 강탈문제는 국회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었고, 부산일보의 전직 임원들과 유가족들은 김영삼, 노무현, 박관용, 이기택 등 부산 출신 의원 전원을 포함한 다수의 국회의원들을 소개 의원으로 하여 <부산일보 등의 소유권 원상회복>을 국회에 청원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과거사 문제는 5공 청산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5·16 군사반란 직후의 부산일보 등 강탈사건은 뒤로 밀리고 3당 합당의 보수대연합이 이루어지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역풍을 맞아 한나라당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등장하면서 정수장학회 문제는 오랜 망각을 벗어나 정치적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2004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우선 조사대상 사건 7건을 뽑을 때,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사건은 1965년 경향신문 강탈사건과 묶어서 박정희 정권 초기 중앙정보부의 언론장악 사건으로 선정되었다. 필자는 이때 이 두 사건을 담당한 조사위원이었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사건의 진상조사에 착수하자 박근혜 대표는 10년간 이사장으로 있으며 20억이 넘는 돈을 꺼내 쓸 수 있던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2005년 부산일보 등 언론 3사가 국가권력에 의해 강탈당한 것으로 결론지었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2007년 동일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부산일보 독자들은 물론 언론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2011년 11월 30일 부산일보 발간정지 사태는 정수장학회가 왜 언론사를 보유하면 안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정수장학회는 현재 부산일보와 MBC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는 원인 무효이다. 최근 김지태 사장의 유족들이 제기한 주식반환 청구소송에서 법원은 재산헌납의 강제성을 인정하고도 시효를 이유로 소송을 기각하는 모순된 판결을 내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바로서야 한다. 인질납치극의 장물이 '장학회'라는 우아한 이름의 지갑에 보관되어서는 안 되고, 인질납치범을 옹호하는 자들이 언론사를 좌지우지해서도 안 된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의 설립 자체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원인무효 행위였다. 부산일보 사우와 독자, 그리고 김지태 사장의 유족들과 그의 유지를 계승할 뜻 있는 사람들로 부일장학회가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유족들은 김지태 사장의 호를 딴 자명장학회로 명명하길 바라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산일보의 독립성을 실현하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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