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⑤ 5·16장학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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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기부승낙서가 변조됐다는 시사저널 2005년 3월 1일자 기사. 한홍구 제공

박정희나 그의 수하들은 김지태에게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김지태를 구속시켜 몸값으로 받아낸 '장물'을 '국가'라는 틀에 담아두는 것은 적절치 않아보였다.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는 김지태가 부일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박정희에게 5·16장학회를 만들어 김지태에게서 빼앗은 언론사를 보유하도록 하라고 권했다. 황용주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평소 언론이 가장 공정하게 되려면 개인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법인이 소유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면서 "이 기회에 부산일보 방송국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재단을 하나 만들자고 생각해서 양쪽의 승낙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군사정부는 5·16장학회를 만들기 위한 분위기 조성 작업에 들어갔다. 1962년 5월 3일 3·1운동에 크게 기여했던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가 25만 환을 장학금으로 내놓자 박정희는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한 젊은 세대의 교육을 위하여 확고하고도 영구적인 장학기금제도를 확립하라"고 관계당국에 지시했다.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손창규는 5월 8일 최고회의 기자실에 내려와 "혁명정부는 군사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5·16장학기금을 만들 예정"이라면서 "오는 5월 16일까지는 그 내용이 확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군사정권은 5·16 1주년을 맞아 장학기금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고자 했으나 김지태가 재산을 내놓지 않아 5·16 장학기금 설립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빼앗은 개인재산 재단법인이 소유
5共 거치며 朴 유가족 사유재산화

신문기사에 단편적으로만 남아있을 뿐 박정희 등이 처음 5·16장학기금에 대하여 어떤 구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5·16장학기금의 설립주체가 '혁명정부'로 되어있는 것으로 볼 때, 정부가 직접 운영하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이 자체 필요성 때문에 위안소를 설립하고도 그 운영을 민간에게 위탁했던 것처럼, 군사정권도 정부가 직접 인질에게 뜯어낸 몸값으로 장학기금을 운영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김지태에게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했지만, 그 재산은 결국 5·16장학회라는 재단법인의 차지가 되었다. 5·16장학회는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그래도 준 국가기구적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5·16의 흔적을 지우고 '새 시대'를 내세우고자 했던 전두환에 의해 정수장학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박정희 유가족의 사유재산처럼 성격이 완전히 변하였다.

징역 7년을 구형받은 김지태가 반쯤 꺾여 재산을 포기하겠다고는 했지만 석방된 후에 법적 절차를 밟겠다며 버티자 5·16장학회의 발족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손창규는 1962년 6월 4일에 가서야 박정희에게 이듬해 3월 1일을 기해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 있는 장학회로 5·16장학회가 발족하게 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보고 후 기자들과 만난 손창규는 5ㆍ16장학회로 국내외 인사들의 희사금이 답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손창규의 발표를 전하면서 <조선일보>는 "알려진 바로는 김지태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문화사업인 <부산일보>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등을 이 5ㆍ16장학회를 위하여 희사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는데, 최고회의 측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김지태가 5·16장학회 앞으로 된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그가 석방되기 전인 6월 20일이었다. 군부는 5·16장학회의 등기절차를 밟으면서 나중에라도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부승낙서를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제출할 때 김지태가 날인 서명한 날짜를 6월 20일에서 30일로 고쳐놓았다. 한자로 썼기에 한 획만 더 그어 놓으면 가능했다. 날짜만 김지태가 석방된 이후로 고쳐놓은 것이다.

2005년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는 이들 문건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문서가 변조된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문서변조 의혹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때 김지태가 '기부'(강탈당한)한 재산은 부산일보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에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으로 떼어 놓은 토지 10만 147평이었다. 주식과 토지의 상당부분이 회사 간부나 친인척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모두 김지태 소유였다. 이 중 토지 10만 평의 대부분은 군에서 징발해서 사용 중이였다.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은 땅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전쟁의 와중에 군에 징발 당한 것이다.5·16장학회는 이 땅을 '기부'받아 국방부에 넘겼는데, 국방부는 '장물'인 이 땅을 5·16장학회로부터 기부 받았다가는 당연히 말썽이 생길 것으로 보았다. 국방부는  이 땅을 5·16장학회에 반환하고 5·16장학회가 이를 다시 원소유자에게 반환조치 한 후 원소유자가 국방부로 등기이전 하도록 했다. 현재 수 조원 대에 이르는 이 땅은 여전히 대부분 국방부 명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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