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④ 재산 강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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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의 회사 임직원 10여명을 잡아들인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2년 3월 29일자. 한홍구 제공

일본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던 김지태는 자기 대신 부인과 회사 임직원들이 옥고를 치르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4월 23일 귀국했다. 중앙정보부는 김포공항으로 귀국한 그를 즉시 체포하여 부산으로 압송했다.

중앙정보부는 김지태에게 부정축재처리법, 외국환관리법, 농지개혁법,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형법, 농지개혁법, 조세범처리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군검찰은 5월 10일 김지태를 경남지구 고등군법재판소에 기소할 때에는 관세법(밀수입)·국내재산도피방지법·형법(허위공문서 작성 및 동 행사죄) 위반에다가 예비적으로 농지개혁법 위반 등 4개 혐의만 적용했다.

김지태, 부인·임직원 수난에 日서 귀국
군검찰 징역 7년 구형에 포기각서 도장


제일 문제가 되었었던 것은 부인 송혜영이 1960년 김지태와 함께 서독 여행 후 귀국할 때 미화 6,200달러(당시 한화 1000만환) 상당의 7캐럿짜리 다이아반지와 사진기를 밀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관세법으로는 세관을 통과할 때 반지를 손에 끼고 들어오면서 보여주면 구두신고를 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송혜영에게 밀수죄를 적용한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군검찰은 송혜영이 석방된 뒤 문제의 다이아반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반지가 밀수된 것이라면 마땅히 압수하여 공매처리하거나 거액의 세금을 부과해야하지만, 반지를 돌려주었다는 것 자체가 밀수는 처음부터 언론사를 빼앗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김지태에게서 기부승낙서 도장을 받아낸 전 법무부장관 고원증은 국정원과거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김지태의 "수사기록을 봤더니 중죄도 아니고 관세법 위반과 사문서 위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김지태는 일본에 있을 때 부일장학회 기본재산으로 내놓은 땅 10만 평의 대부분이 현재 국방부에서 징발해서 쓰고 있는 토지이기 때문에 이를 내놓는 것으로 사건이 무마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김지태는 황용주 등 군사정권과 교섭했던 회사측 사람들의 말을 믿고 귀국했으나, 막상 귀국해보니 군부의 재산헌납요구는 끝이 없었다고 한다. 김지태가 풀려난 뒤 남긴 비망록에서 자세한 목록을 보지도 못하고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울분을 토로하는 것으로 보아 군사정권은 처음에는 김지태의 기를 꺾기 위해 박정희의 속셈이 언론사 강탈에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억울한 혐의를 덮어쓴 김지태는 재산헌납요구에 완강히 저항했다. 한 달여 동안 나름 꿋꿋이 버티던 김지태가 무릎을 꿇은 것은 5월 24일 군검찰이 김지태에게 징역 7년형을 구형한 직후였다.

징역 7년은 김지태로서는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중형이었다. 그가 7년 동안 갇혀있게 된다면 조선견직, 대한생사, 삼화고무 등 애써 키워온 회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고, 수천 여 종업원들도 모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총칼로 나라를 차지한 인질강도들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결국 회사는 회사대로 망하고 김지태 자신도 7년간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김지태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김지태는 7년 구형을 받은 뒤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해 재산포기각서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서울에서 재산포기각서를 들고 온 것은 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인 신직수였다. 신직수는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의 사단법무참모로, 박정희 집권기간 내내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 등 계속 고위직을 지낸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다. 김지태가 재산포기각서를 작성해준 것은 5월 25일, 군검찰의 구형이 있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김지태는 일단 재산포기각서를 작성했지만 재산의 정식 '헌납' 절차는 자신이 풀려난 뒤에 밟겠다고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김지태를 잡아들여 수사한 것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인데, 재산 '헌납'은 박정희가 직접 보낸 자들이 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지태를 잡아들인 부산지부장 박용기가 재산을 빼앗고 풀어주는 것은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일이지 어떻게 민주국가에서 남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가"라며 수사책임자로서 재산을 받고 풀어주는 짓은 못 하겠다고 반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박정희의 눈 밖에 난 박용기는 1962년 9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목적으로 관내 기업인들에게서 부당하게 돈을 거두었다는 명목으로 구속되고 만다.

신직수가 일단 재산포기각서를 받아냈으나 김지태는 버티고 박용기는 재산 강탈에 직접 나서지 않자, 박정희는 군법무관 출신으로 5·16 직후 법무부장관을 지낸 고원증을 보내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하게 했다. 6월 20일 수감중인 김지태를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로 부른 고원증은 미리 작성해 간 기부승낙서에 김지태의 장남이 가져온 인감도장을 찍게 했다. 재산을 '헌납'해도 자신이 풀려나고 난 뒤에 하겠다던 김지태도 결국 '납치범'들에게 굴복한 것이다. 김지태는 이틀 후인 6월 22일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군검찰의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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