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③ 사건의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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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김지태에 대한 조사보고서. 한홍구 제공

1962년 3월 27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부산일보 전무인 윤우동, 한국생사 상무 이상학, 조선견직 전무 배정기 등 김지태 회사 임직원 10여명을 구속했다. 이 당시 김지태는 일본 출장 중이어서 잡혀가지는 않았다. 김지태가 귀국하지 않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사흘 뒤 부인 송혜영을 잡아들였다. 김지태를 귀국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김지태는 느닷없이 회사간부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일본에서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나름 파악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게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는 4월혁명 직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리지 않았지만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군사정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김지태는 이병철 등 경제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재산헌납 각서를 제출하고 6월 30일 석방되었다. 이 때는 재벌들이 다 구속된 것이고,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 5억 4천만 환을 납부함으로써 부정축재자 처리 문제는 일단락 된 것이다. 실제로 부정축재 환수금을 낸 재벌들 중에서 다시 잡혀간 사람은 김지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지태에 대한 중앙정보부 평가
박정희 지시 이후 180도 달라져

정수장학회 사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 벌어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가 자세한 회고담을 남긴 바 있다. 박용기는 육사 8기로 이른바 '혁명주체'의 한 사람이었다. 육사 8기라면 김종필과 동기이지만, 육사 8기가 워낙 숫자가 많고 교육기간이 짧았던 지라 김종필과는 5·16 직전에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박용기가 일약 '혁명주체'에 끼게 된 것은 그가 1군사령관 이한림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 막강한 야전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이한림의 체포는 5·16의 성패를 좌우하는 사건이었다. 박용기가 2000년 4월 발간된 <진주지>에 기고한 <5·16과 1군>이란 글을 보면 박정희는 1962년 정초 연휴에 부산에 내려와 자신과 독대한 자리에서 김지태가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를 하고 있으며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니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박용기는 2004년 이후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김지태에 대한 수사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서 독자적으로 한 것이고 박정희는 "김지태에 대해 잘 알아보라"는 정도로 언급한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고조되기 전에 먼저 쓴 내용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김지태를 조사하라는 박정희의 지시가 있기 이전과 이후의 김지태에 대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평가가 180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김지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기 이전에 정보부가 작성한 <정치인실태조사표>라는 김지태 동향보고서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김지태는 지조가 강하고 "혁명시책을 지지협조"하고 있으며 '선행' 란에는 "부산일보사 내에 부일장학회를 두고 3개 방식으로 지급 운영 중"이고 '인기' 항목에는 "부일장학회 관계로 찬양, 신망이 있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건 직전인 3월 1일 경찰이 작성한 <정치인실태조사표>에 따르면 김지태는 "금력과 권력에 의해 변절하는 기회주의적 편승파로 지조 없는 자"이고 "자유당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정치적 부패가 농후한 자"이며고 부일장학회 등 육영사업도 "정치성이 개재된 불순한 선행"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부의 다른 보고서에는 김지태가 "주민들로부터 사생활 문란과 호화생활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는 전형적인 부정부패 사범"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권력자 입맛에 맞는 사실이라는 점은 박정희의 지시 이전과 이후로 김지태에 대한 정보기관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진 예에서도 다시 한 번 증명된다.

김지태의 유족들이나 일부에서는 김지태가 재산을 강탈당한 것에 대해 박정희가 부산일보 주필인 대구사범 동창 황용주를 통해 김지태 사장에게 쿠데타 자금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데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황용주는 김지태가 박정희가 뒤엎으려는 민주당 정권의 핵심인사들과 절친한 사이이고, 과거 자유당의 정치자금 요청을 거부한 적도 있어 김지태에게 자금제공을 요청해보았자 거부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자금제공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얘기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이 문제로 김지태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족 입장에서는 자금 제공 거부에 따른 보복설이 나름 합리적인 설명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에 부합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사건의 근본원인은 김지태가 언론사를 갖고 있었고 박정희는 언론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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