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② 왜 하필 언론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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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사장이 옥중에서 재산헌납을 거부할 때 조선일보는 '김지태 씨가 헌납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홍구 제공

1962년 김지태를 잡아들이고 박정희가 빼앗아 간 것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 언론 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인 땅 10만 여 평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지태의 재산 중 언론사에 비해 훨씬 더 규모가 큰 조선견직, 대한생사, 삼화고무 등은 김지태가 계속 경영할 수 있게 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연합철강의 권철현, 전두환 정권 시기 동명목재의 강석진이나 국제그룹의 양정모가 재산과 경영권을 모두 빼앗긴 것과는 일의 처리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부산일보 사장실서 생중계된 3·15
박정희 "격변기 펜 장악해야" 결심

김지태는 어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박정희에게 특별히 밉보여 잡혀간 것이 아니었다. 언론을 갖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언론사를 몹시 탐냈던 것이다.

1960년 1월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내려온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와 자주 어울려 지냈다. 부산일보사에 빈번히 출입하던 박정희는 이 과정에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이 4·19혁명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부산일보는 마침 1959년 6월 15일 마산에 직할지사를 설치했다.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 3월 15일 저녁 자유당이 멋대로 조작한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외쳐댔다. 부산일보 마산주재기자 허종과 이순명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마산의 급박한 상황을 전화로 부산의 본사에 알렸다.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는 부산 MBC 라디오의 중계차를 부산일보사 앞에 대고 사장실에서 마산 뉴스를 보도하도록 했다. 경찰은 방송이 부산문화방송 사옥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부산문화방송 사옥으로 가 방송 중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사이 부산일보 사장실에서 쏘아 보낸 3·15의거의 생생한 뉴스는 일본 NHK 9시 뉴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부산문화방송과 부일뉴스는 혁명을 생중계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렸고 현장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을 돌을 묶어 중앙부두 앞바다에 빠뜨리도록 한 장본인은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였다. 박종표는 일제시기에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라는 일본이름으로 악질적인 헌병 보조원 노릇을 하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잡혀간 자였다. 반민특위가 유야무야되면서 풀려난 아라이는 결국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3·15의거가 있고 근 한 달이 지나 중앙부두 앞바다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마산주재 허종 기자는 허겁지겁 달려가 김주열의 시신을 향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경찰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자리를 피한 허종은 사진을 본사로 보냈다. 부산일보는 김주열의 사진을 크게 실었고, 사진을 더 뽑아 다른 신문사에도 제공했다.

부산일보가 특종한 김주열의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에도 크게 실렸다. 4월혁명이 전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으로서 박정희는 이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들여다보았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산일보 주필인 황용주와 긴밀히 협의했다. 박정희 자신도 정치적인 격변기에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목격한데다가 황용주는 동창생인 박정희에게 펜은 칼보다 강하다면서 정권을 잡고 유지하려면 반드시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5월 16일 당일 새벽 박정희가 향한 곳도 남산 KBS방송국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KBS도 서울신문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박정희는 1962년 1월 무렵(김지태를 잡아들일 것을 지시하던 바로 그 때) 경향신문도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장면과 가까웠던 천주교 측이 장면 정권을 전복한 박정희에게 신문사를 넘길 수 없다며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앙지 인수에는 실패했지만, 박정희는 끝내 김지태에게서 부산일보를 빼앗아버렸다.

박정희는 이때 부산문화방송과 한국문화방송 역시 빼앗았다. 당시 한국문화방송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세한 규모였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김지태는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의 RCA TV가 칼라방송을 시작하면서 필요 없게 된 흑백TV 시설을 인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지태는 부산에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의 이원체제를 구축했던 것처럼, 서울에도 한국문화방송에다가 연합신문을 새로이 인수하여 이원체제를 구축하고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지닌 매스컴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시대를 앞선 김지태의 원대한 꿈은 박정희의 권력욕에 짓밟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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