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그때 그 늬우스] 양모(養母) 찾아 미국(美國)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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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일 밤 十一시 혼혈고아 八十六명이 十五명의 보모를 따라 먼 미국에 있는 양모를 찾아 KNA 전세기편으로 말 없이 떠났다. 외국인 부대 장병과의 사랑으로 얻은 불우한 한국여성의 귀염동이인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생후 十개월 내지 一년 정도의 갓난아기였다. 그중 十세가량 되는 소년도 七, 八명 끼여 있었는데 이들은 서울시내 「홀트」해외입양자회의 알선으로 미국 「포오트란드」 시민들과 양자의 인연을 맺았는데 十일에는 양부모들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이날 공항에는 모성애에 못 이겨 달려온 十여 명의 三十대 여성들이 비에 젖은 활주로를 미끄러져가는 비행기를 향하여 흐느껴우는가 하면 어느 여성은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 1961년 7월 9일>

우리나라에서 해외입양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였다. 이후 현재까지 17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해외에 입양된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정부는 '고아양자특별조치법'이란 법을 만들어 해외입양을 권장했다. 미군과 한국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와 전쟁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초기 해외입양된 아동의 상당수는 혼혈아였다. 통계에 따르면 1955년부터 59년까지 해외입양된 어린이 2천887명 가운데 약 70%인 1천995명이 혼혈아라고 하며, 1973년까지 총 5천500여 명의 혼혈 어린이가 해외로 보내졌다고 한다.

기사는 86명의 혼혈아가 단체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장면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아기와 생이별하는 엄마의 고통이 애절하게 전해진다. 다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혼혈아의 경우엔 차별과 멸시받는 시선도 컸을 터, 더 나은 곳에서 자식이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라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했으리라. 대개 부모의 마음은 이렇지 않았겠나. <김해군 진례면 담안리 곽치곤(郭致坤)(四四)씨는 열한살나는 아들 수근(髓謹)군을 남의 양자로 주고 싶다고 二十八일 본사에 찾아와 호소했다. 곽씨는 三남一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수근군은 세째이며 올해 국민학교 五학년이라 한다. 수근군은 머리가 우수하여 一학년부터 내내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곽씨는 아들의 공부를 시켜주고 싶으나 농촌 경제사정으로는 도시의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수근군을 의아들로 맞아 공부를 시켜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호소했다. - 1962년 4월 29일> 정광용 기자 ky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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