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잊지 못한 내 아들 스코시를 찾습니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한 미군부대에서 하비 루제더 중사의 양아들 스코시(오른쪽)가 루제더 중사의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하비 루제더 씨 제공

"60년 동안 잊지 못한 내 아들, '스코시(Skoshi)'를 찾습니다."

지난달 21일 전쟁고아 관련 복지기관인 광주 충현원의 유해량 원장은 미국에서 날아온 낯선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메일의 내용은 미국인 하비 루제더(86) 씨가 6·25전쟁 때 한국에서 입양한 한국인 소년 스코시(당시 11세)를 애타게 찾는다는 것. 또 이 같은 내용을 부산의 지역신문에 게재하고 싶다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6·26 때 부산서
美헌병 근무 루제더 씨
"아빠처럼 되고 싶다"던
당시 입양한 11세
전쟁 고아 찾기 나서


루제더 씨는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하할 때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미국 제563헌병중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그의 계급은 중사였다. 스코시라는 이름의 한국인 고아를 만난 것도 루제더 씨가 부산에서 헌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루제더 씨는 전쟁 중에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어버린 스코시를 발견하고 자신의 부대로 데리고 와 스코시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했다. 마침 전쟁통에 오갈 데도 없었던 스코시도 루제더 씨의 따뜻한 보살핌에 마음을 열고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전쟁 속에서 가족의 정을 교환했고 루제더 씨가 스코시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기에 이른다.

"나중에 크면 나도 미군에 입대해 아빠처럼 헌병이 되고 싶어요." 루제더 씨는 아들 스코시가 자신에게 종종 했던 말을 아직까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부자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루제더 씨가 본국 소환 명령을 받고 먼저 귀국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아들 스코시를 데려가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루제더 씨는 급하게 짐을 싸면서 어쩔 수 없이 동료 병사에게 스코시를 맡겼는데 스코시에게는 "꼭 데리러 오겠다"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이것이 스코시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루제더 씨는 스코시를 맡긴 동료 병사에게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부탁했고, 스코시는 미국 입국 수속 절차까지 밟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이후 스코시를 돌보던 동료 병사도 다른 부대 배치 명령을 받게 됐다. 그때부터 루제더 씨는 스코시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이후 루제더 씨는 미국에 살면서 여든을 훌쩍 넘겼고, 아들 스코시도 한국에 생존해 있다면 67세의 노인이 될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루제더 씨의 조카 에드워드 시로비 씨는 "하루는 한국의 전쟁 추모 웹사이트에 게재된 스코시의 사진을 삼촌께 보여드렸는데 삼촌은 무척 슬퍼하셨다"면서 "삼촌은 아직도 스코시의 생사와 거처를 여전히 궁금해 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꼭 스코시와 재회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스코시가 현재까지 부산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도 "부산 시민 중에 스코시의 거처를 알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우리에게 꼭 연락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연락처 062-652-2214(광주 충현원).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