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 코치 신의손
90년대 한국축구를 깨운 '이방인'
프로축구가 출범 10년째를 맞던 지난 1992년. 국가대표팀이 1986년, 1990년 월드컵 본선에 연거푸 출전한 덕분에 축구팬들의 눈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때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선수가 나타났다. 다들 "세계 축구 수준이 이런 것이구나"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급급했다. 옛 소련에서 날아온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였다. 그가 지키는 골문은 철벽이었다. 아무나 함부로 근접할 수 없었고, 골도 마음대로 넣을 수 없었다. 아무리 슈팅을 해도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외국인 선수였지만 '신의 손'으로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금은 귀화해 '신의손(申宜孫)'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그가 한국에 온 지 만 20년이 됐다. 국가대표팀 코치 등 화려한 경력을 거친 끝에 지난 연말에는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 코치가 됐다. "지난달 28일이 정확히 20년이 되는 날이었죠." 그는 자신이 한국에 처음 정착한 날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20년이 지나니 얼굴만 러시아인이지 마음은 한국인이 다 됐습니다. 고향이 그립지 않냐고요? 지난 20년 동안 선수와 코치로 일하면서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느라 바쁘게 살다 보니 딴생각할 틈도 없죠."
92년 일화 입단 첫 외국인 골키퍼
K리그 4년 연속 0점대 실점 거미손 명성
외국인 영입제한 걸려 한때 시련
출전기회 적어지고 퇴출위기까지 몰려…
마흔 살에 귀화 결정 옛 명성 되찾아
2005년 현역 은퇴 후 코치로 제2의 삶
■축구를 좋아했던 소년
부산 아이파크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신의손(오른쪽) 코치. |
신의손 코치는 앞으로도 한국 축구를 위해 일할 각오다.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여전히 없다. 그에게 한국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과 미래형이다. 김경현 기자 view@ |
프로축구는 외국인 골키퍼 영입 제한 규정을 만들었다. 사리체프가 너무 잘했기 때문이었다. 1996~98년 3년 동안 조금씩 외국인 골키퍼 출전 기회를 줄였다. 나중에는 아예 외국인 골키퍼 영입이 금지됐다.
선수로 활약할 때 모습 |
월드컵 계기 한국축구 놀라운 성장
아들은 미국, 딸은 캐나다서 직장생활
인터넷서 정 다지는 우린 글로벌 가족
고향 러시아 그립지 않냐고요?
난 한국사람, 한국축구 위해 일할 거예요
사리체프는 불안해졌다. 경기에 자주 나갈 수 없어 기량 유지도 어려웠다. 1996년 27경기 51골, 1997년 16경기 27골, 1998년 5경기 16골. 해마다 실점은 많아졌다. 그는 퇴출 위기에 몰렸다. 그렇다고 유럽으로 갈 수도 없었다.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 받아주는 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흔들리자 일화도 흔들렸다. 1996년 박종환 감독이 물러났다. 대신 지휘봉을 잡은 이장수 감독 대행 체제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벨기에에서 레네 감독이 들어왔지만 마찬가지였다.
사리체프는 천안을 떠나 안양 LG로 이적했다. 처음에는 플레잉 코치로 일했다. 2000년 연습경기를 하다 우연히 골키퍼 자리를 지켰다. 그는 선방했다. 즉석에서 귀화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이름은 신의손으로 바꿨다.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됐다. 한국인이 돼 안정을 찾은 그는 옛 기량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경기당 실점은 다시 0점대로 떨어졌다.
■신의 손이 되는 노하우
신의손 코치가 구단 사무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지난해 연말 그는 부산 아이파크 안익수 감독으로부터 "골키퍼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주저하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안 감독과 한정국 사무국장은 그가 일화에서 활약할 때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었다. "가깝지는 않았어도 서로 알고 지냈어요. 이후 소속이 달라졌지만 연락은 주고받았죠. 대교에 들어갈 때는 안 감독이 추천을 했습니다."
아이파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체프 형' '선생님'으로 불린다. 안병모 단장과 안 감독, 코치들은 그를 체프 형이라고 부르고 선수들은 선생님이라고 한다.
올림픽대표팀 골키퍼이기도 한 이범영은 내년에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최근 부산 구단과 3년 계약 연장에 합의했다. 2014년 말까지 잔류하기로 한 것이다. 신의손 코치 때문이다.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면 앞으로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는 게 구단의 설명이다.
신의손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 축구가 많이 변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장 속도가 정말 느렸다. 그러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가 급격하게 성장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과거 러시아(옛소련)는 강팀이었어요. 지금 한국은 러시아와 맞붙더라도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을 정도가 됐죠."
그가 처음 왔을 때 한국은 골키퍼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브라질이 한때 골키퍼를 무시하다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제대로 못했어요.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골키퍼는 경기의 50~60%를 차지한다고 봐요. 좋은 골키퍼가 있어야 선수들이 심리적 안정을 찾고 자신감 있게 경기를 하죠.
■이제는 영원한 한국인
신의손은 경남 김해로 집을 옮겼다. 이사할 때 그를 알아본 이웃주민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부인과 단 둘이 산다. 아들은 미국, 딸은 캐나다에 있다. 그곳에서 직장을 구해 살고 있다. 딸은 못 본 지 5년, 아들은 2년 정도 됐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 다행이에요. 화상으로 자주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누죠."
신의손은 러시아 모스크바에도 집이 있다.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고 한다. 과거 같이 축구를 했던 친구들이 다 거기 있다. 지금은 굳이 가지 않더라도 인터넷으로 자주 만난다.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모스크바에 가면 가끔 마신단다.(애주가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사실 술이 세다. 안 단장 말에 따르면 최근 회식 때 소주를 대여섯 병 마신 뒤 보드카 한 병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고 한다.)
신의손은 20년 동안 축구만 생각하며 한국에서 살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힘든 시절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지도자 생활을 그만 둔 뒤에도 한국에 남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한국사람이에요.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 축구를 위해 일해요. 한 시즌을 마치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느라 1년이 금방 가죠. 앞으로 10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안병모 단장이 본 신의손
우리는 사리체프 코치를 체프 형이라고 부른다. 구단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를 영입하기에 앞서 구단주가 한 번 보자고 했다. 이럴 경우 대개 구단주가 정해주는 때를 약속시간으로 하기 마련이다. 체프 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가 편리한 오후 시간인 4시에 맞춰 만나자고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대교 선수들의 마지막 훈련을 마쳐야 한다. 아직 부산 아이파크 코치가 아니기 때문에 현 소속팀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
체프 형이 부산 선수들과 첫인사를 나눈 날이었다. 골키퍼들은 '내일부터 훈련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는 큰 오산이었다. 그는 선수들과 각각 30분 이상 인터뷰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개인별 강점과 약점을 파악했다.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코치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체프 형의 취미는 LP음반 수집이다. 약 500장 정도를 모았다고 한다. 부산에 오자마자 "LP판을 사려면 부산에서는 어디에 가야 하나"라고 물을 정도였다. 분명하고 깔끔하고 시원시원한 그의 성격을 볼 때 머지않아 완벽한 '부산 사나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