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그래도 유럽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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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식 동아대 동북아국제대학원 교수·국제학

지난 2년간 세계는 유럽의 행보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특히 이번 주는 그리스와 유로존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로, 유로그룹 회의 결과에 따라 큰 전환점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태가 이러하니 유럽이 건설해 왔던 많은 것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도한 복지 시스템, 개별국가의 방만한 재정 운용, 심지어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지역경제통합 그 자체에까지 부정적 시선이 주어지는 상황이다.

노사갈등의 합리적 해결방식 큰 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으며, 명확히 말해서,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통합을 택했다. 단순한 협력이 아닌, 경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유럽 건설을 목표로 한 장기 플랜의 실천에 돌입한 것이다. 일시적 화해 무드에서의 협력이나 단순한 지역 간 시장개방과는 구별된다. 사회 분위기가 변해도,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될 수 있는 합리적 제도가 오늘날의 거대 지역공동체인 유럽연합(EU)을 창조했다. 회원국의 개별정부가 존속하면서도 공동체가 일정한 정책 권한을 양도받아 대리 집행하는,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섬세하게 잘 짜인 제도는 회원국 내부에서 요구하는 많은 부분에 합리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노사갈등의 합리적인 해결방식에 제일 관심이 끌린다.

현재 세계 각국 경제는 대량 실업, 노사 문제, 그리고 고용 위기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유럽도 같은 위기를 겪고 있으나, 이전 시기 합리적 제도화 덕택에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경험이 적지 않다. 1970년대의 네덜란드는 만성적 재정적자와 악명 높은 실업률로 대변되는 '네덜란드 병'을 앓고 있었다. 이를 노·사·정 협의 제도를 통해 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협약을 도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1980년대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사례 국가가 되었다.

또한 198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가장 낙후한 국가였던 아일랜드는 사회 대단합을 이끌어낸 노·사·정 협의를 계기로 크게 도약한 국가이다. 임금 인상 수준에 대한 노동계 주도의 합의와 시장 개방은 매력적인 직접 투자의 요지로 각광받아 1990년대를 거쳐 10여 년간 높은 경제성장을 견인하기에 이른다. 제도적 합의를 토대로 성장을 거듭한 아일랜드는 2007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무려 6만 달러를 상회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독일 등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노·사·정 협의 제도의 합리적 완성을 이끌어 왔다. 이에 1973년 조직된 유럽노동조합연합이 개별 국가와의 공조를 통해 유럽식 노·사·정 협의제에 대한 정책 지원을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유럽식 노·사·정 협의 제도는 단순히 임금을 협상하거나 갈등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체제가 아니다. 노·사·정 각각은 조직 내 합의 가능한 대안을 수렴하여 이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협의에 임하게 된다. 노·사·정 각각이 자신의 조직뿐 아니라 사회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공익을 우선시하여 집단의 이익을 조정하고 시기를 분별해 나아갈 정도로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공익 우선 노·사·정 협의제 교훈 거울 삼아야

우리는 지난해 전국적인 주요 뉴스로 다루어졌던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한다. 반복되는 노사 간 대립, 노조 대표의 크레인 점령에 이어 파업이 장기간 지속되자 사회 중심 이슈로 부각되어 희망버스 사태, 지역민 갈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다. 발전을 위한 대안 없이 양측의 입장만을 되풀이한 채 반목을 거듭한 이후 사회와 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일련의 파업은 끝을 맺었으나 결과는 참혹하다. 선박 수주가 끊기고, 새로운 주문이 없어 생산직 가운데 절반이 넘는 400여 명이 현재 휴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갈등의 과정을 지켜보며 이제는 유럽식 노·사·정 협의제와 같은 합리적 제도화를 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계적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현재 노동자의 권익만 보장할 수도 없는 일이며, 사회적으로 사실상 재취업이 어려운 경직된 구조에서 사측의 입장만을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럽의 교훈을 거울삼아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합리적 제도가 하루빨리 마련되어 국익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나누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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