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자유정신 충만한 즐거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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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금초·박시교·이우걸·유재영 29년 만의 공동 시조집 '네 사람의 노래'

한국의 대표 시조시인 네 명이 29년 만에 공동 시조집 '네 사람의 노래'를 냈다. 왼쪽부터 유재영, 윤금초, 이우걸, 박시교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1983년 평론가 김병익 선생이 주선해 문학과지성사(문지)에서 '네 사람의 얼굴'이란 공동 시조집을 냈습니다. 현대 문학을 주로 발행하는 문지가 전통 문학인 시조집을 냈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죠."(이우걸 시인).

윤금초(70), 박시교(67), 이우걸(66), 유재영(64) 시인의 공동 시조집은 젊은 시조시인 사이에 교과서와 같았다. 현대 시조의 다양한 경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30~40대 젊은 작가였던 그들은 같은 해 '오늘의 시조학회'(시조시인회의 전신)도 만들었다. 50여 명의 젊은 시조시인을 모아 새로운 시조 쓰기 운동을 주도했다. 고루한 시조 대신 현대적 시조 쓰기를 통해 시단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이들은 그동안 시조집, 시조평론집 등을 활발하게 발간했다. 네 사람 모두 국내 최고 권위의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고, 주요 시조문학상 심사에 참여해오고 있다. 한국 시조의 현대화 기치를 든 이들이 시단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이들이 공동 시조집 '네 사람의 노래'(문학과지성사)를 내며 다시 뭉쳤다. 무려 29년 만이다. 세월의 진폭만큼 각자의 작품이 쌓였고, 경향도 달라져 다시 선집을 묶게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조 시인 네 명의 시조 색채는 변화무쌍하다. 한 세대가 흘렀지만 실험과 자유정신이 내뿜는 아우라는 여전하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윤금초 시인은 서사성을 끌어오며 형식적 실험을 즐긴다.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평시조, 사설시조, 엇시조 등 다양한 형식을 섞은 '옴니버스 시조'다.

박시교 시인은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반세기 넘게 땅에 묻혀 구멍 난 녹슨 철모/ 그 아픈 상흔(傷痕) 뚫고 싹 튀운 풀꽃 본다/ 가녀린/ 꽃 흔들림 본다/ 오 죽장(竹槍)과 피리 사이'('어머니-그 사이' 중).

이우걸 시인은 시대 의식을 철저히 반영하면서 서정성과 현장성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 비누를 마지막으로 쓰고 김 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비누' 중).

세상을 떠난 노동자 집을 방문했다가 얇은 비누 한 장으로 남은 고인의 자취를 보고 쓴 작품이다. 시인은 "그 사람 집을 나와 언덕길을 오르는데 희미하게 떠 있는 낮달이 비누 같았다"며 "젊은 시절엔 서정성과 미감에 초점을 뒀는데 시조(時調)란 의미처럼 당대 현실을 최대한 담아내려 한다"고 했다.

유재영 시인은 반대의 경우. 과거엔 노동운동 같은 치열한 현실을 담았지만, 요즘은 전통적인 소재를 유미적으로 풀어낸다. '이 나라 지극한 인심이며 햇빛이며/ 봉숭아 꽃물에다 우리 누님 울음까지/ 잘 구운 질흙 대장경 오디 빛 저 항아리'('조선 옹기를 주제로 한 세 가지의 시적 변용' 중).

시인들은 시조 특유의 정형성, 절제와 여운의 미를 지켜가면서 실험 정신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시적 자유를 향한 네 사람의 노래가 즐거운 이유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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