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투성이 아이' 고소득·고학력 가정도 예외 아니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아동학대 아이들이 울고 있어요

지난해 12월 어린이재단 부설 부산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은 4년째 집 안에 갇혀있던 A(17·여) 양을 구조해 냈다. A 양의 첫 마디는 "인터넷에서만 보던 진짜 세상을 보고 싶어요"였다.


■학대 가해자 직업 공무원·회사관리직·전문직 비중 5% 넘어

지난 2010년 전국 각지에서 신고된 아동학대 의심 신고는 모두 9천199건이다. 이 가운데 현장조사 결과 아동보호기관의 개입이 필요한 실제 아동학대는 5천657건에 달했다. 방치해 둘 수 없는 잠재 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례도 506건이나 됐다. 의심사례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실제로 확인된 셈이다.

부산의 아동학대 양상도 전국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해 456건의 아동학대 의심신고가 접수됐고 이 가운데 291건에서 실제 학대를 확인했다.

한국사회에서 아동학대는 육아에 무지한 부모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정의 전유물 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근래 아동학대 경향을 분석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아동학대 가해자 직업군 통례에 따르면 학대 가해자 가운데 공무원이나 회사 관리직, 전문직의 비중이 이미 5%를 넘어서고 있다.

부산의 고학력·고소득 가정도 아동학대에서 예외는 아니다. 2009년 부모로부터 격리조치된 윤수(13·가명)가 초등학생 시절 남긴 진술서에는 "한자시험에 떨어졌다. 아빠가 각목으로 20대를 때렸다" "숙제를 안하고 논다고 혁대로 때리고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는 겁에 질린 진술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명문대를 졸업해 학원을 운영하던 윤수 아버지는 귀가하면 폭군으로 돌변했다. 윤수는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꼬박 앉아 공부만 해야 했다. 행여 졸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물을 뿌리고 매질을 했다.

동생 셋과 함께 학대를 당한 철민이(16·가명)네도 아버지가 병원장이었다. 경찰은 밤마다 아이들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는 신고에 거듭 철민이네를 찾았지만 번번히 허탕을 치고 말았다. 80평 대 아파트에 살며 '우리 집에 무슨 아동학대냐'며 반문하는 교양 넘치는 철민이 어머니의 말에 토를 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가해자는 전직 교사였던 철민이 어머니였다. 남편 병원이 몰락하면서 오는 경제적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던 그녀는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아이공감 정신클리닉 안정미 원장은 "아이가 괴로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 이 고비만 넘기면 아이가 행복해 질 것'이라는 삐뚤어진 확신이 학대로 이어지고 있다"며 "자수성가한 사람 가운데도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성공 전까지 많은 좌절을 경험한 경우 아이의 정서를 읽어내는 데 서툴다"고 평했다.


학원장 아빠 귀가하면 폭군
각목으로 때리고 겁 주고

병원장집 밤마다 비명소리
경찰 출동해도 번번이 허탕

정서적 학대도 후유증 커
지속 관심 마라톤치료 필요
멍든 동심 억눌린 스트레스
결국 학교 폭력 가해자로…


■신체학대는 일시적… 정서학대가 학교폭력으로

한편 일선에서는 이 같은 고소득·고학력 가정의 아동학대만이 아니라 아동의 정서학대도 그 심각성을 재조명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재단 부설 부산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의 아동학대 유형별 통계를 봐도 신체학대보다 정서학대가 더 잦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이후 3년 간 부산에서 신고된 아동학대 가운데 정서학대는 신체학대보다 15~20% 가량 비중이 높았다.

정체된 신체학대에 비해 서민 가정이 무너지고 미혼모 가정이 늘면서 정서학대나 방임은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부 당국의 대처가 미흡하다는 게 일선 아동상담 전문가들의 우려다. 신체학대와 정서학대는 중복되기 쉽지만 정서학대는 단순한 부모의 폭언 정도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학대가 무서운 점은 후유증이 오래 가고 2차 피해자가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폭언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라난 아동은 이를 건강하게 표출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억눌러진 스트레스는 부모에게 배운대로 괴성을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발산되며 이는 주로 학교에서 발산된다. 학대 피해아동의 연령층은 15세 미만에 집중되어 있다. 초등학생 시절 아동학대로 고통받던 이들이 중·고교로 진학하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 아동학대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기관은 부산시아동보호종합센터와 부산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 단 2곳 뿐이다. 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의 경우 부산시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아 해운대구와 기장군을 비롯해 6개 지자체의 아동보호를 담당하고 있지만 1년 예산은 4억8천만 원에 그치고 있다. 특히 정서학대 피해아동을 치유할 치료 예산으로 할당된 금액은 500만 원에 불과해 산술적으로 지자체 1곳 당 100만 원 지출도 부담스러운 게 현실이다.

당장 짧게는 수 주일, 길게는 수 개월의 병원 신세만 지면 재활이 이루어지는 신체학대와 달리 정서학대는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한데다 이 비용마저 만만치가 않다. 부산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 조윤영 관장은 "자존감이 무너진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풀배터리 검사'라는 종합심리검사로 상황을 판단하고 놀이나 미술치료가 병행되어야 하지만 검사 비용이 25만 원 선, 이후 심리치료가 1회 당 5만 원 수준의 고가여서 학대 상황이 급박한 경우가 아니면 망설여 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