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부산대한의학전문대학원교수 윤영주
학생운동하다 제적, 노동운동에 옥살이까지 서울대 의대 졸업하는 데만 23년 걸렸습니다
남다른 인생역정을 보낸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윤영주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가 학생운동으로 제적됐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뒤늦게 동의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수석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재입학해 입학 23년 만에 의대를 졸업했다. 지금은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모두 취득한 복수면허자가 되어 치료가 잘 안 되는 환자들을 한양방 협진으로 진료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참 멀리 돌아온 그에게 인생의 의미와 행복은 무엇일까.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윤영주(49) 교수.
프로필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빨리 만나고 싶었다.
수줍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없이 여리게 보인다.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힘들게 돌아가는 삶을 선택했을까.
그를 만나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이고, 행복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人+間'은 두 차례의 인터뷰, 그의 저서 및 각종 칼럼에 기고한 글을 종합해 일인칭 시점으로 인생 역정을 재구성했다.
한 해가 서서히 저문다. 해가 바뀌면 이제 나이가…. 나이를 생각하니 체력도 능력도 더 떨어지는 것 같아 10년 정도 젊게 살기로 했다. 마음 먹기 따라 생각만큼은 얼마든지 젊은 사람을 따라갈 수 있으니까.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고입 연합고사에서 전국 여자 수석을 차지해 부모님과 선생님을 기쁘게 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누가 물으면 그때마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신장이 안 좋아 응급실로 자주 실려가던 어머니를 보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81학번으로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공부만 잘했다. 공부 외에는 지금도 잘하는 게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는 시험을 잘 본다는 말이다. 시험을 잘 보려면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잘 뽑아서 달달 외우면 된다. 공부를 잘 하는 게 창조적 능력이나 전문적 실력이 있다는 말과 절대 동의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과도하게 평가된다. 물론 나도 그 덕을 보았다.
의예과 시절 서울 봉천동의 달동네에서 의료봉사를 하다 회의가 왔다.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질병을 얻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밥 잘 챙겨 먹고 과로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을 따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되면 그들의 병도 많이 사라질 것인데. 환자를 고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고치는 일이 더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난 이과보다 문과형의 사람이었다. '의사의 길', 이건 나에게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초. 의대생이 학생운동을 하고, 그러다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그리 특별하지 않던 시대였다.
의예과 시절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환자 고치는 일보다 사회 고치는 일이
더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수배생활 하다 제적, 옥살이까지 겪은 후
정해진 운명처럼 한의대 입학했다
우여곡절 끝 수석졸업 뒤 서울대 복학
마흔둘 최고령으로 학사모 썼다수배 생활을 하다 85년 학교에서 제적이 되었다. 어차피 '의사의 길'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주로 경기도 성남에서 활동을 했다. 봉제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서 '시다' 생활도 했다. 이게 나에게 맞는 길이라고 믿었다. 87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6개월 옥고를 치른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88년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사면되었다. 하지만 복학해서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들었다. 칼바람 부는 엄동설한에 홑껍데기만 걸치고 혼자 내몰린 느낌이었다.
그 컴컴한 터널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 '동지(冬至)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는 말을 이때 알게 됐다. '밤이 깊고 혹한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천지의 기운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말이 그렇게 가슴 벅찰 수 없었다. 그 뒤 이 말은 하나의 주문이 되었다. 지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처럼 힘들다면 가장 힘든 것은 이미 지나간 거야, 이렇게 되뇌었다. 자연스럽게 옆동네 학문인 한의학으로 관심이 이어졌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한의학에 관심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1994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운명처럼 동의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의술보다 생각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난 서양의학보다 한의학에 더 맞는 사람이었다.
시련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95~96년 한약분쟁으로 우리는 전원 유급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학교를 일 년 더 다녀야 했다. 1년 반이 넘는 투쟁 기간에 경험한 그 뜨거운 논쟁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나고 나니 그게 빛이 되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1년 입학한 지 7년 만에 동의대 한의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마침 서울대에서 학생운동과 관련된 제적생에게 복학을 허용했다. 늦었지만 서울대 본과 2학년에 재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부산일보에 이때 기사가 실렸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주부의 몸이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라 열심히 학업에 힘쓴 결과 수석졸업이란 영예까지 안았다.' 그때 기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보다 많이 앳되게 보인다. 2004년 입학한 지 23년 만에 마침내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 마흔둘의 최고령 졸업자로 학사모를 썼다. 그해에 의사 면허를 따서 '복수면허자'가 되었다.
편한 길 두고 왜 힘든 길 돌아왔느냐고?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내가 원했던 일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싶다
의사·한의사 면허 모두 취득했지만
한쪽 전문가 되기도 쉽지 않은 길…
서양 의학- 한의학 융합 땐 상승효과
두 의학 소통 '가교 역할' 하고 싶다
![]() |
윤영주 씨가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왼쪽), 다시 서울대에 입학한 지 23년 만에 의대를 졸업해서(가운데), 현재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는 모습.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미소를 윤 씨에게서 만날 수 있다. |
![]() |
윤 교수는 안전하고 보장된 일만 하려는 요즘 학생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당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