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은 선조들의 '밸런타인데이'였다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 김영조
농경사회에서 민중이 마음 놓고 쉴 날은 많지 않았다. 기계문명도 발달하지 않았고, 365일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뜻밖에도 우리 선조는 현대인들보다 여유로웠다. 4대 명절뿐만 아니라 24절기, 삼복(三伏)까지 누렸으니…. 힘든 농경 생활 속에서도 절기와 계절에 몸을 맡길 이웃과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잔치였던 옛사람들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겨울잠 자는 벌레나 동물이 깨어나 꿈틀거리는 경칩은 24절기 중 하나다. 경칩이 한국의 '밸런타인데이'였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경칩 땐 사랑의 징표 은행씨앗 주고받고
중양절엔 국화로 화전 부치고 술도 담고 …
잊혀 가는 우리 조상들의 세시풍속과 삶
겨레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재조명
이날 젊은 남녀들은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서 은행씨앗을 선물로 주고받았다. 은밀하게 은행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수나무, 암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지기도 했다.
경칩은 정월대보름, 칠월칠석과 함께 '토종 연인의 날'이었던 셈이다.
양력 9월 초에 맞는 백로는 효심을 떠올리게 하는 절기.
백로에서 한가위까지 포도가 제철이란 뜻으로 '포도순절'이라 한다.그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을 상징하는데 조선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한다.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 껍데기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입으로 먹여주던 정을 일컫는다.
지금은 아이에게 이렇게 포도를 먹이는 어머니는 없겠지만, 포도를 먹을 때도 부모님 사랑을 떠올리는 우리 겨레. 역시 효에 관한 한 대단한 민족이다.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 중양은 음양사상에 따라 양수(홀수)가 겹쳤다는 뜻. 설날, 삼짇날, 단오, 칠석과 함께 명절로 지냈다.
신라 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품평을 하는 백일장을 열었다. 중양절에는 국화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거나 국화잎으로 술을 담갔다. 국화술은 향기가 좋아 많은 사람이 즐겼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에 노란 국화를 띄워 마셨다.
이날은 나이 드신 어른들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고 즐겼는데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45권을 보면 1429년 9월 9일에 "중양절이므로 술을 원로 대신에게 내리고 잔치를 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하루하루가 잔치로세'는 하루하루에 해당하는 절기, 국경일, 기념일에 맞춰 우리 선조의 365일을 재구성한 책이다.
고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겨레가 누려왔던 세시풍속과 민족문화의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근·현대를 거치며 어떤 문화와 여유를 잃어버렸는지 깨닫게 한다. 24절기, 4대 명절, 삼복과 관련한 역사적 인물, 세시풍속 등 겨레문화 속살을 볼 수 있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인 저자는 2004년부터 매일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이메일을 독자들에게 띄워왔다. 8년째 하루도 쉬지 않고 잊힌 우리 문화와 선조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책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 재미있고 핵심적인 내용을 엄선한 것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이 겨레의 스승 세종대왕의 탄신일에서 왔다는 것, 4세기 중엽 로마 교황청이 성탄절을 우리의 동지설날과 같은 날로 정했다는 사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훔쳐 오지 않았다는 내용 등 우리 문화의 숨겨진 뒷이야기들도 많다.
날짜와 우리 문화를 연관 지어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겨레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 박수를 보낸다. 김영조 지음/인물과사상사/544쪽/1만 8천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