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대책 구호… 시민 안전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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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지진의 참상을 확인한 부산 시민들은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부산도 지진이나 지진해일, 원전 사고 등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부산시 등 관계기관은 요란한 대책을 세워 놓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대로는 시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순간, 시민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대부분 대피소 위치 모르고 훈련도 형식적
도보 30분 대피 불가능, "시스템 개선 시급"



■ 대피소는 어디에… 공무원만 안다?

"쓰나미 같은 게 오면 어디 피할 시간이나 있겠어요, 휩쓸려 가는 거지. 대피소 같은 건 몰라요. 누가 설명해 준 적도 없고."

지난 15일 오후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 D횟집을 운영 중인 정 모(52·여) 씨는 "쓰나미가 오면 무조건 높은 데로 가야지, 아니면 지하로 가나?"라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갈치시장 건물 안에서 만난 상인들 역시 한결같이 "대피소 같은 거 잘 모른다. 좀 가르쳐 달라"고 답했다.

부산시와 중구청은 지난 2005년 지진해일이 1천200여 명이 상주하는 자갈치시장 일대에 닥치면 경보 발령 30분 이내에 인근 초등학교에 이들을 수용한다는 'E-30'계획을 세워놓았지만, 주민들은 계획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쓰나미 같은 재난이 느닷없이 닥치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반상회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충분히 홍보하고 있다"는 부산시의 설명도 소용이 없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대피할지 전혀 모르는 시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30분 안에 못 가는 'E-30' 대피소

지진이나 지진해일이 발생했을 때 과연 어디로 피해야 할까? 부산시는 시내 전역을 대상으로 지진해일 등 풍수해에 취약한 30개 지구를 선정해 30분 이내에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E-30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지진해일에 취약한 이유 때문에 대피지구로 지정된 부산 시내 18곳의 위험 지구 대피소 가운데 물리적으로 3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없는 대피소가 여럿 있다.

태풍 및 지진해일에 취약한 해운대구 동백섬 및 해운대 해수욕장 주변 지구의 경우 대피장소로 지정된 부산기계공고로 이동하려면 직선거리로만 2.68㎞ 떨어져 있다. 도로를 따라 걸어서 가면 40분 가량 걸린다. 사하구 구평지구의 경우 대피소인 구평초등학교까지의 직선거리는 4.9㎞이며 도보로 무려 1시간 14분 이상이 걸린다. 30분 이내 대피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부산시가 지진·지진해일·화재 발생시 시민행동요령으로 배포하고 있는 자료에는 대피는 도보로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 내진 설계도 안 된 건물에 대피를?

지진을 피해 대피하라고 마련한 재난대피소가 내진 설계도 안돼 지진에 무방비 상태라면, 자칫 아찔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부산시가 지정한 지진 재난대피소 102곳 중 5곳이 내진 설계가 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지진대피소로 지정된 영도구의 Y초등학교와 B고등학교, 기장군 D초등학교, 부산진구 Y초등학교 등 학교 4곳은 내진 설계가 전혀 안 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상구 지역 지진 재난대피소로 지정된 C복지시설 역시 내진 설계가 돼 있지 않은 상태다.

부산시와 구청이 협의도 하지 않고 공공기관과 민간 건물을 대피소로 지정한 사례도 있다.

부산 동래구 지진대피소로 지정된 A빌딩을 소유한 A사의 관계자는 "지진 대피소로 지정돼 있다는 통보를 받은 적도, 협의를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영남지원 관계자도 "지진해일 대피소 지정과 관련해서 협의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 융통성 없는 민방위훈련

시민 안전을 위해서 지진, 지진해일, 원전 사고 등에 대비한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재난 대비 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부경대 소방공학과 박외철 교수는 "지난 15일 열린 민방위 훈련의 경우 평소와 같은 전시 대비 훈련이 아닌 지진 대비 훈련이 됐어야 했다"며 "요즘처럼 지진 피해에 민감한 때 시민들이 직접 대비 훈련에 참여해 본다면 실제 재난 상황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텐데 융통성이 없다"고 꼬집었다.

보여주기 식으로 이뤄지는 훈련에 대한 비판도 있다.

부산시가 지난 15일 실시한 제383차 민방위의 날 민방공대피훈련 역시 여전히 계획된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생명 지키는 대피소 가보기 운동'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날 일부 학교는 지진 대비 훈련으로 전환해 책상 밑에 대피하는 훈련을 하였으나, 또 다른 학교는 1층 복도에 대피해 고개를 숙이는 방공 훈련을 실시했다.

■ 문자메시지 왜 안 보내나. 시민을 중심에 세워라

재난 상황이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주민에게 알리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전파하는 방식은 각 방송사의 재난 방송, 민방위 경보, 재해 문자 전광판 등이 전부다.

박외철 교수는 "방송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동통신사와 협조하면 시민 가입자들에게 SMS를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 왜 그런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또 최근 신속한 의사 소통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를 활용한 전파 방식은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진 매뉴얼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집 주변 재난 대피소에 대한 정보를 아파트 가이드북 등을 통해 안내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 공무원들이 책상에서 두꺼운 매뉴얼만 만들 게 아니라 이를 시민에게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층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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