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비화 60년] ⑥ YS와 함께 민주화 투쟁 최 형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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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 시비 일자 YS에 "그럼, 조직 없앨까요" 압박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2008년 10월 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부친 고 김홍조옹 빈소가 마련된 경남 마산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YS와 반갑게 만나고 있다. YS는 최 전 장관을 만나자 마자 "몸도 불편한데 뭐할라꼬 왔노"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부산일보 DB

그가 없었다면 '대통령 김영삼(YS)'도 없었다.

최형우(1935~)는 박정희 시대부터 5·6공화국까지 투지와 집념으로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저돌적인 정치인이었다.

△"내 꿈은 YS 대통령 만들기"

제14대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1992년 10월. 민주자유당 대선후보인 YS가 민주산악회 회장인 최형우를 불렀다. "사조직(민주산악회)에서 어떻게 하기에 공조직에서 그렇게 말이 많소." 대선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민주산악회 지부와 민자당 지구당 조직이 마찰을 빚자 YS가 최형우를 야단친 것이다.

YS에 큰소리 쳤던 '불도저'…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
기장군 부산 편입·연제구 신설 등 행정구역 개편 추진

그러자 최형우는 "공조직이 적극적으로 안 움직이니깐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정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사조직을) 없애도록 하지요"라며 YS를 역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YS는 민주산악회 활동을 둘러싼 시비를 불문에 부치고 대선을 치러야 했다.

정치를 시작한 이래 최형우의 삶은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온통 바쳐졌다. 위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YS보다도 오히려 더 적극적이기도 했다.

울산 울주군이 고향인 최형우는 이곳에서 8~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 YS가 13대 대선에 낙선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최형우도 벼랑 끝에서 승부를 펼쳤다.

YS는 정치적 회생을 위해서는 제2도시인 부산에서의 바람이 필요하다고 봤고, 그 바람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형우를 동원한 것이다. 최형우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던 울산 지역구를 두말없이 버리고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래을에 출마했다.

문제는 최형우가 지역구를 옮기면서 가족들에게조차 한마디 상의도 안 했다는 점이다. 그 무렵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최형우의 부인(원영일)을 찾아와 두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총선에서 당선된 최형우는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맡았다. 당시 원내 협상이 끝나면 당 총재인 YS가 "큰일 낼 사람이네. 이 사람"이라고 최형우를 질책하곤 했다고 한다. 총재의 꾸지람을 듣더라도 원내총무로서 양보할 것은 과감하게 양보하는 협상 스타일 때문이었다.

최형우는 누구보다도 YS에게 큰소리(?)를 쳤던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내무부 장관 시절의 최형우를 기억하는 관료출신 정치인은 "최 장관이 집무실에서 대통령 전화를 받으면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꼰 채 올려놓고 YS에게 대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최형우의 YS대통령 만들기는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시절 정무장관을 맡으면서 가장 빛을 발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 "내 평생 꿈이 YS가 대통령 되는 것"이라고 압박했다. 노 대통령이 퇴임 후 안전문제를 걱정하자 "도움을 받고도 각하(노태우)를 잘 모시지 않으면 제가 육탄으로라도 막겠다"고 'YS 세일즈'에 나섰다.

얼마 뒤 노태우는 자신의 측근들을 만나 "왜 나한테는 최형우 같은 사람이 없느냐"며 한탄하기도 했다.

△부·울·경 지도를 바꾸다

1994년 1월 최형우 내무부 장관은 김기재 기획관리실장을 차관보로 전격 발령 낸다. 기획관리실장을 맡은 지 불과 2개월도 안 된 김기재의 보직을 다시 바꾼 것은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특별임무를 전담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무부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행정구역 개편이 지역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무엇보다 시·군 통합으로 인해 고위 공직자들의 보직이 없어지기 때문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최형우가 밀어붙이면서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오자 내무부 관료들은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문민정부 최고의 실세인 최형우가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고, 업무처리가 치밀하고 기획력 있는 김기재가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이 같은 비유를 한 것이다.

최형우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인 '동래을'을 동래구에서 분구시켜 연제구로 신설했다. 연산동과 거제동을 관할하는 연제구는 1995년 3월 '9개 자치구 설치 및 특별시 광역시도 간 관할구역 변경 등에 관한 법률'을 통해 부산의 새로운 구로 만들어진다.

이는 최형우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연제구가 행정중심타운으로 개발되면서 부산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경남 양산군 소속이던 기장읍 등 동부 5개 읍·면이 기장군으로 승격하면서 부산에 편입된 것도 최형우의 힘이 컸다. 기장 주민대표들이 최형우를 찾아와 이를 청했고, 결국 기장읍·장안읍·일광면·정관면·철마면 등 5개 읍·면을 떼어 내 독립된 군으로 만든 뒤 부산광역시에 편입시킨 것이다. 또 경남에 속해 있던 울산도 이 때 광역시 승격의 가닥을 잡는다.

당시 경남은 도세(道勢)가 줄어든다면서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김혁규를 YS와 연결시켜 정치권으로 이끌어준 사람이 사실상 최형우였다는 점에서 큰 변수는 되지 못했다.

울산광역시승격법안은 1996년 12월 국회 내무위에서 통과됐지만 본회의 의결이 마지막 관문으로 남았다. 그때는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개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팽팽하게 대치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울산광역시승격법안은 다음 회기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최형우가 나서 절대로 미룰 수 없다면서 울산 국회의원들과 함께 몰아붙였고 결국 처리안건에 포함됐다.

법안 통과에 따라 울산은 이듬해인 1997년 7월 15일 광역시로 승격되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최형우는 그해 3월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벌어진 당내 갈등 상황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울산광역시 승격'의 환호를 병상에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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