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교육 헌신'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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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의 초석을 놓았던 로맨티스트, 먼구름 한형석 선생. 부산일보DB

먼구름 한형석은 한일강제병합이 강행됐던 1910년에 태어난 '병합둥이'다. 1910년 2월 12일. "하필이면 그렇게도 운 나쁜 해를 골라 세상에 나타났는지…."

그러나 불운한 해에 태어난 그의 삶은 청소년문화예술운동에 100년의 가교를 놓았다. 그것은 한일병합의 역사가 짓이겨놓은 식민지 조선의 삶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는 그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한형석의 아버지인 한흥교는 일본 유학 중 아내의 뱃속에 있던 한형석도 못 본 채 독립운동을 위해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가극 '아리랑' 항일의식 고취
해방 후 문화·예술활동 전념
부민동 자유아동극장 애착 커


한형석은 다섯 살이 되던 해 삼촌 한정교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갔고, 그 뒤 3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예술을 통한 구국활동을 펼쳤다. 중국 국민당 군대의 장교로 전투에 참전하고, 광복군으로 한미합동 OSS 특수공작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가극 '아리랑'과 '압록강행진곡' '국기가' '조국행진곡' 등 수많은 독립군가를 만들었다. 문화예술투쟁에 독보적 존재였던 거다.

그 시기는 신산했지만 한형석에게는 청소년 문화예술운동의 초석을 놓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30여 년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한형석은 50년 6월 18일 수백만 원의 빚까지 내가며 부산문화극장을 열었다. 연극에 갈증을 느꼈던 부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져 개관 공연만 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문화적 사업을 위해 일어섰다. 항일음악가였던 그에게 한국전쟁은 또 다른 책무를 부여했다. 53년 8월 15일 전쟁통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부산 서구 부민동 변전소 옆에 목조 단층의 자유아동극장 겸 색동야학원을 열었다. 창립취지서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에 대한 정서함양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나서야 할 일이지만 마냥 그때를 기다릴 수 없다'고 천명했다.

자유아동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 그림연극이 공연됐다. 2년 동안 500여 회 공연에 11만 8천여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자유아동극장은 밤이 되면 색동야학원으로 변신했다.

한형석의 부인 강호전 씨는 "당시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던 백색전화기 한 대를 시어머니로부터 받아 땅 사는 데 쓰고, 친구들로부터 돈을 일부 후원받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또 "부산대 강사로 나가면서 아동극장을 운영했는데, 월급을 받아도 가난한 사람에게 월급째로 주는 바람에 쌀 살 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어쩔 수 없이 2년 만에 자유아동극장의 문을 닫아야 했던 그때의 일은 두고두고 한형석에게 회한으로 남았다.

한형석 선생 탄생 100년, 그 회한을 희망으로 바꿔야 할 때다. 청소년문화예술교육을 향한 그 희망이 조카인 조한혜정 교수와 서울의 하자센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그 희망은 더욱 진화해 나갈 채비를 차리고 있다. 이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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