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높은 사람으로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나 세상 밖에서 노닐며 마음 닦는 도를 오로지 하려는 이는 다 오라!"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190년, 30대 초반의 기운 쟁쟁한 지눌(知訥·1158∼1210) 스님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혼탁한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교와 선을 아울러 도(道) 한번 제대로 닦아보자는 외침이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는 지눌이 그 결사(結社)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입구 팔작지붕, 뒤쪽 맞배지붕… 물과 어울린 풍경 '압권'
용머리상 엽전 등 무욕정진 '수행의 힘' 여실히 보여줘
지눌이 겨냥했던 바, 송광사는 속세의 티끌을 묻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송광사로 오르는 길에 마음씻음을 강조하는 곳이 많음은 그 때문이다. 절 아래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천천히 걷다 보면 저만치서 누다리(누각처럼 지붕을 올린 다리)가 나타난다. 청량각(淸凉閣)이다. '청량'은 '맑고 깨끗함'이니 세속의 번뇌를 이곳에서 말끔히 씻고 가라는 의미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서 우화각(羽化閣)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우화각 맞은편에 조그만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재 지내기 위해 절로 들이려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잠깐 모시는 곳이다. 망자의 영혼에 묻어 있는 속세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장소. 척주각은 남자, 세월각은 여자의 위패를 모신다.
우화각은 능허교(凌虛橋)라는 다리와 한 묶음으로 봐야 한다. 누다리 형태인 것이다. 송광사 앞으로는 조계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이를 건너야 비로소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능허교는 그를 위해 조선 숙종 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돌로 지어진 능허교는 삼청교(三淸橋)라고도 불리는데, '능허'는 '허허로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고, '삼청'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것이니, 둘 다 불국(佛國), 이상향으로 가는 다리를 염원한 것이다. 능허교는 홍예(虹霓·무지개) 다리다. 아래 가운데 부분을 19개의 장대석으로 짜 올려 반원형의 아름다운 홍예를 이루고 있다.
우화각은 그 능허교 위에 정면 1칸, 측면 4칸으로 지어졌다. 양편에 장대석 4개를 연결해 낮은 난간으로 삼았고, 기와를 올린 지붕은 입구쪽은 팔작, 뒤쪽은 맞배지붕으로 서로 다르게 꾸몄다. 안쪽에 두 짝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한 문루 형식이라 누다리 건물로는 특이하다. '우화' 역시 신선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니 '능허'나 '삼청'과 짝을 이루는 이름이라 하겠다.
그렇게 내포된 의미와 함께 우화각과 능허교가 맑은 계곡물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정취는 송광사 풍경의 압권이다. 유려한 무지개 다리와 누각이 하늘과 구름, 나무와 함께 맑은 수면에 투영된 모습은 송광사가 선계(仙界)나 불국(佛國)에 다름 아님을 알게 해 준다. 마치 땅의 일부를 점하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허공에 부유하는 환상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우화각의 그런 정취를 더해주는 건물이 옆에 있다. 임경당(臨鏡堂)과 침계루(枕溪樓)다. 임경당은 '거울처럼 맑은 물에 가까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우화각의 오른편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물 일부가 계곡 쪽으로 튀어 나와 아래 두 기둥이 계곡물에 드리워져 있다. 우화각 난간에 걸터앉아 임경당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은 거울처럼 맑아진다.
우화각 왼쪽의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제법 큰 2층 누각이다. '계곡을 베고 누웠다'는 이름처럼 계곡을 따라 늘어선 육중한 나무 기둥들은 오늘날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리는 송광사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송광사의 힘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처(佛)나 가르침(法)이 아니라 현재의 수행자(僧)를 가장 보배롭게 여기는 데서 나오는 힘이다. 옛날 송광사를 통해 배출된 국사(國師)가 16명이 된다는 사실은 송광사의 수행이 얼마나 힘 있는 것인지 증명해 준다.
송광사의 수행정신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흔적이 능허교에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데, 능허교 아래쪽 홍예 한가운데에 수면을 향해 배꼽처럼 툭 튀어나온, 용머리 석상이 있다. 이 용머리상은 수살막이, 즉 계곡물에서 음습하는 나쁜 기운을 용의 기운을 빌어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용머리 입 부분에 엽전이 철사줄에 꿰어져 매달려 있다.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능허교를 놓을 때 시줏돈을 받았는데, 다리를 완공하고 보니 그 엽전이 남았다. 공사를 감독하던 스님은 그걸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다리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엽전 한 닢도 허투루 가지려 하지 않는 반듯한 수행자의 모습을 송광사는 오늘에 기억하려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저작 '심춘순례'에서 송광사를 "조선불교의 완성지"라고 했다. 우화각과 능허교, 그 아래의 엽전은 육당이 빈말하지 않았음을 알게 해 준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뜻이 높은 사람으로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나 세상 밖에서 노닐며 마음 닦는 도를 오로지 하려는 이는 다 오라!"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190년, 30대 초반의 기운 쟁쟁한 지눌(知訥·1158∼1210) 스님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혼탁한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교와 선을 아울러 도(道) 한번 제대로 닦아보자는 외침이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는 지눌이 그 결사(結社)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입구 팔작지붕, 뒤쪽 맞배지붕… 물과 어울린 풍경 '압권'
용머리상 엽전 등 무욕정진 '수행의 힘' 여실히 보여줘
지눌이 겨냥했던 바, 송광사는 속세의 티끌을 묻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송광사로 오르는 길에 마음씻음을 강조하는 곳이 많음은 그 때문이다. 절 아래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천천히 걷다 보면 저만치서 누다리(누각처럼 지붕을 올린 다리)가 나타난다. 청량각(淸凉閣)이다. '청량'은 '맑고 깨끗함'이니 세속의 번뇌를 이곳에서 말끔히 씻고 가라는 의미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서 우화각(羽化閣)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우화각 맞은편에 조그만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재 지내기 위해 절로 들이려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잠깐 모시는 곳이다. 망자의 영혼에 묻어 있는 속세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장소. 척주각은 남자, 세월각은 여자의 위패를 모신다.
우화각은 능허교(凌虛橋)라는 다리와 한 묶음으로 봐야 한다. 누다리 형태인 것이다. 송광사 앞으로는 조계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이를 건너야 비로소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능허교는 그를 위해 조선 숙종 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돌로 지어진 능허교는 삼청교(三淸橋)라고도 불리는데, '능허'는 '허허로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고, '삼청'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것이니, 둘 다 불국(佛國), 이상향으로 가는 다리를 염원한 것이다. 능허교는 홍예(虹霓·무지개) 다리다. 아래 가운데 부분을 19개의 장대석으로 짜 올려 반원형의 아름다운 홍예를 이루고 있다.
우화각은 그 능허교 위에 정면 1칸, 측면 4칸으로 지어졌다. 양편에 장대석 4개를 연결해 낮은 난간으로 삼았고, 기와를 올린 지붕은 입구쪽은 팔작, 뒤쪽은 맞배지붕으로 서로 다르게 꾸몄다. 안쪽에 두 짝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한 문루 형식이라 누다리 건물로는 특이하다. '우화' 역시 신선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니 '능허'나 '삼청'과 짝을 이루는 이름이라 하겠다.
그렇게 내포된 의미와 함께 우화각과 능허교가 맑은 계곡물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정취는 송광사 풍경의 압권이다. 유려한 무지개 다리와 누각이 하늘과 구름, 나무와 함께 맑은 수면에 투영된 모습은 송광사가 선계(仙界)나 불국(佛國)에 다름 아님을 알게 해 준다. 마치 땅의 일부를 점하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허공에 부유하는 환상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우화각의 그런 정취를 더해주는 건물이 옆에 있다. 임경당(臨鏡堂)과 침계루(枕溪樓)다. 임경당은 '거울처럼 맑은 물에 가까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우화각의 오른편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물 일부가 계곡 쪽으로 튀어 나와 아래 두 기둥이 계곡물에 드리워져 있다. 우화각 난간에 걸터앉아 임경당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은 거울처럼 맑아진다.
우화각 왼쪽의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제법 큰 2층 누각이다. '계곡을 베고 누웠다'는 이름처럼 계곡을 따라 늘어선 육중한 나무 기둥들은 오늘날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리는 송광사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송광사의 힘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처(佛)나 가르침(法)이 아니라 현재의 수행자(僧)를 가장 보배롭게 여기는 데서 나오는 힘이다. 옛날 송광사를 통해 배출된 국사(國師)가 16명이 된다는 사실은 송광사의 수행이 얼마나 힘 있는 것인지 증명해 준다.
송광사의 수행정신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흔적이 능허교에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데, 능허교 아래쪽 홍예 한가운데에 수면을 향해 배꼽처럼 툭 튀어나온, 용머리 석상이 있다. 이 용머리상은 수살막이, 즉 계곡물에서 음습하는 나쁜 기운을 용의 기운을 빌어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용머리 입 부분에 엽전이 철사줄에 꿰어져 매달려 있다.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능허교를 놓을 때 시줏돈을 받았는데, 다리를 완공하고 보니 그 엽전이 남았다. 공사를 감독하던 스님은 그걸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다리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엽전 한 닢도 허투루 가지려 하지 않는 반듯한 수행자의 모습을 송광사는 오늘에 기억하려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저작 '심춘순례'에서 송광사를 "조선불교의 완성지"라고 했다. 우화각과 능허교, 그 아래의 엽전은 육당이 빈말하지 않았음을 알게 해 준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