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배우라는 이름으로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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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영화배우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퍼붓는다. 베란다에 맞붙은 산 덕분에 짙푸른 녹음에다 물기까지 더해지니. 온통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생각지도 않게 글을 쓰게 되고 보니 늘 보던 창 밖 풍경까지 새삼스레 다가온다. 시험을 앞둔 학창시절처럼 떨리고 숨고 싶기도 하고,지금의 심정이 꼭 그렇다.

7월도 어느덧 절반이 다 지났다. 올해는 시작부터 무척이나 바빴다. 연초에는 TV프로그램에,지난달까지는 '구미호 가족'이라는 영화를 찍느라 두어 달 동안 쉬지도 못했다. 새로 시작한 '누가 그녀와 잤을까'라는 영화 역시 7월에 바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야말로 온몸이 파김치다. 대학에서 강의까지 맡은 상황이라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배우 생활이란 게 이렇다. 일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시간이 많을 땐 일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이런 게 배우들의 실상이다. 누군가가 불러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보여줄 기회가 없다.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다림이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고 이겨내야 할 적이다. 화면이나 스크린에 보여지는 근사함이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는 일상과는 너무도 많이 차이가 나기 마련인 것이다.

1997년에 '카멜레온의 시'라는 영화로 데뷔를 했으니 연기 생활도 벌써 20년을 바라본다. 그동안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연극 작품들이 나를 거쳐 갔다. 다행스럽게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고,그 중 몇 편들은 많은 사랑도 받았다. 배우 박준규를 이야기 할 때,'야인 시대'라는 드라마의 '쌍칼' 역할을 빼고서는 시작이 안 될 듯싶다. 100부작 드라마에서 내가 출연한 횟수는 고작 11회뿐이었는데,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쌍칼 큰형님'이라 불러주니 배우로서는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내 연기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 그 작품이 2001년 작이다. 날 때부터 '영화배우 박노식 아들 박준규'에서 '쌍칼 박준규'가 된 그때가 불과 몇 년 전인 것이다. 한 해에 서너편의 영화에 그것도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도 늘 주목받지 못할 때 너무도 괴로웠다. 주변의 2세 영화배우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데,이러다간 아버지 이름에 부끄러운 아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일이 안 풀리는 데 대한 울분으로 늘 벼랑 끝에 서있는 심정이었다. 연기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몇 년 간은 특히나 그런 조급함이 더욱 힘들었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쌍칼 형님 랩 한번만 해주세요'라며 다가온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내 모습을 보고,친밀감을 느껴서 일 것이다. 배우가 연기는 안 하고 웬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빈정거리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로 인해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데뷔 초기와 비교해 보면 어디에서 그런 캐릭터를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주어진대로 연기만 했다면 나는 아직도 '의리의 큰형님'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고,결과는 아주 만족스럽다. 만일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들 때문에 움츠러들고,소신대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또다른 기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에 시작한 영화에서 고등학생으로 나온다.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보통의 수줍은 고등학생으로. 이렇게만 얘기해도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한다,마흔이 넘어서 교복을 입고 한참 어린 배우들과 촬영을 하다보니 나 역시 우습고도 신선한 기분이다. 대본을 읽어 본 큰아들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빠,이거 너무 망가지시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또 이런다.

"그래도 아빠가 하시면 어울릴 것 같아요. 교복 입으시면 귀엽겠다."

이런 게 배우 박준규의 힘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주는 나의 가족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잘 해내고 싶은 나의 욕심. 이런 소소한 것들이야말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힘이고,세상을 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됨을 나는 믿는다. 거창하고 원대한 막연한 꿈이나 목표보다는 하나하나 주어진 작은 일들을 성실히 해나갈 때,또다른 기회가 주어짐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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