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형 칼럼] 일본은 아직도 '유엔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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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지난달 주말을 틈타 대마도를 다녀왔다. 밤이면 광안대로의 불빛이 보인다는 최북단 한국전망대 인근에 있는 도노사키 공원을 둘러보는 순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1905년 러·일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일본 해군과 한판 승부를 벌였던 대마도 앞바다 전투에서 희생된 러시아 병사 4천836명과 일본 병사 117명의 이름이 일일이 기록된 동판과 함께. 그 옆에는 패전 후 병석에 누워 있는 로제스트 벤스키 당시 발틱 함대 사령관을 찾아가 위로하는 일본군 수뇌부의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때 일본 주민들이 러시아 패잔병들을 따뜻하게 대해 줬다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마치 찬란했던 과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집단적 자위권은 재무장 수순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될 이웃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동판 아래 쓰여 있는 글귀였다. 우호(友好)와 평화(平和). 우리나라를 을사늑약으로 몰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러·일 전쟁. 그런 침략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넋을 위로하는 비석에 '우호'라는 글이 과연 어울리기나 한 것인지. '평화'라는 두 글자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과거 대마도 앞바다를 붉게 물들인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글을 써놓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사과와 반성'의 뜻을 담은 안내문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게다가 우리 역사에 치욕을 안겨준 러·일 전쟁 관련 위령비를 굳이 부산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한국 전망대 주변에 세울 이유가 있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날 치열했던 전투는 그곳 도노사키 공원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아소만 부근에서 벌어졌는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최근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받는데 목을 매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동맹 관계에 있는 나라가 침략을 받을 땐 일본 자위대가 나서서 반격을 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자위권을 갖겠다는 뜻이다. 평화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재무장을 추진하겠다는 극우 아베 정권의 행보처럼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침략주의적 본성을 부추기려는 속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더욱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런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정부의 태도다. 지난주 미국을 방문했던 김장수 청와대국가안보실장이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 국민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한국의 주권과 관련될 때는 한국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김 실장의 발언이 우리 정부가 내어 놓은 유일한 공식 반응이다. 조건부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동북아 안보 구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짜놓은 큰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정부 당국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외교적인 딜레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과거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략하다 급기야는 강제 점령을 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나라가 아닌가. 그런 일본이 사과는커녕 반성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서 노골적으로 재무장을 시도하는 것을 '강건너 불구경' 하듯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혹자는 말한다. "현행 국제법상 유엔에 가입한 나라는 누구나 집단적 자위권을 가질 수 있다. 일본만 예외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반대 논리는 더욱 명쾌하다. 현행 유엔헌장 53조에는 아직도 '일본은 유엔의 적국'이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연합군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고도 사과는 물론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보통 나라'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유엔헌장 107조에는 '적국으로 규정된 나라가 침략전쟁을 할 때에는 유엔 가맹국이 안보리 결의 없이 그 국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행동 지침까지 명시해 놓고 있듯이.

일본은 이 같은 국제사회의 시선을 무시해서 안 된다.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경제대국으로서 걸맞은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것이 '재발 방지 약속'으로 이어져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 역시 그 날이 올 때까지 절대로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될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을 수십 번 반복해 온 나라가 바로 일본이니까. jun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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