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신춘문예-평론<가작>] 촬영되는 가족, 관찰되는 서사 / 김종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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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미리의 '가족시네마'를 중심으로

1. 디아스포라로 살고 쓰는 것

유미리는 스스로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다"라고 아쿠타가와 상 시상식장에서 밝혔다. 이 말을 두고 국가, 민족이라는 범주에 대해 의도적으로 규정적 태도를 거부해 왔다고 보고 유미리를 재일 한국인 작가로서 다루는 것이 온당한 것이지 혹은 또 하나의 일본 소설 열풍의 주인공으로 분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지 의문시하는 시선이 있다. 또 다른 논자는 유미리를 정체성을 거부한 실존을 기반으로 문학을 하는 데 매우 유효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고, 자신과 현실 간에 가로놓인 깊은 틈에 주목하여, 현대인이 처한 정신적 고독과 세계와의 이질감이라는 문제를 독특한 감수성으로 도출해 내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유미리의 '가족시네마'를 보는 시선은 재일 조선인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평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일본의 어느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고 보거나 그것을 막연히 세계적인 보편성이라는 말로 치부하는 담론들이다.

하지만 루카치는 "이념과 현실 사이는 작가의 의식적이고 밖으로 드러나는 지혜에 의해 채워지기 때문에 빈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작가의 이러한 지혜는 형상화 되기 이전에 이미 처리되어 형식의 배후에 감추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작가에게 있어 작품은 자신의 삶 체험이 세계와의 끊임없는 갈등의 부산물로, 하나의 완결된 구성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유미리의 '가족시네마' 또한 그녀의 정체성이 밴 삶의 서사인 것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녀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은 드러나기 마련일 것이라는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그것이 루카치의 말처럼 형식적인 장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작가의 실제 삶의 행적을 담고 있는 수필이나 인터뷰 기사는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재일 조선인의 삶'
소설 속 영화를 삽입하는 '이중적 허구' 중요한 요소


이쯤에서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다"라는 유미리의 말을 재음미해 볼 때, 혹시 결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재일 디아스포라인의 삶을 뜻하는 말은 아닐까. 유미리는 '가족시네마'에서 낯선 땅에서 관찰되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삶을 자신의 실제 가족에 빗대어 긴밀하게 보이고 있다. 그 가족의 삶을 관찰하는 주체는 재일 조선인이 아닌 불특정 정주자들이 될 것이다. 결코 정주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디아스포라 삶은 그 타자들에게 영원한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시선은 공감을 위한 관심이 아니라 경계와 요시찰의 시선이 될 것이다. 유미리 또한 이러한 이방인으로 살아왔기에 어쩌면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가족시네마' 속에 그 원체험의 흔적과 흔들리는 정체성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자에게 관찰되면서 보여지는 삶이란, 틈새의 경계에 놓인 불안함과 더불어 그 근원에 대한 갈구를 쉽사리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없는 현실적 한계 상황을 상시 수반하게 한다.

2. 카메라와 이중적 허구

앙드레 바쟁은 그의 저서에서 "영화는 몽타주의 여러 기법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영상의 조형적 내용에 의해서도 표현된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처리방식을 공급해 줄 무기고를 남김 없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영화'라는 장치를 도입하는 작가의 의도가 서사 진행의 단순한 흥미적인 요소 이상의 비중이 내재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앨런 스피겔은 지성과 경건한 애정이 가득한 인간의 시선과 비교하면서 카메라의 눈과 같은 시선을 목격자의 시선에 비유한다. 목격자는 그 집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기에, 그는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이며 우리에게 전에 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폭로한다. 앨런 스피겔은 그 무언가에 대해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한 번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간과 우연 아래 놓인 평범하고, 따분하며, 무거운 이미지들의 세계이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마음에 담아 온 세계 속의 이상적 이미지와는 분명히 매우 다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유미리의 '가족시네마'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여느 소설과는 차별적으로 영화제작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담은 형식이라는 것이다. 유미리의 실제 가족과 상당히 닮은 것으로 알려진 이 소설의 이야기는 허구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 영화 촬영의 내용은 이 소설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에 대한 재허구화된 가족 이야기이며, 그 두 층위의 가족 이야기가 동일한 인물들에 의해 관통되어 진행되는 내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가족시네마'라는 영화 촬영에서 가족들은 '카메라-off'일 때의 허구화된 가족 역할과 '카메라-on'일 때의 재허구화된 가족 역할에서 차이를 보인다. 소설이나 영화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실제 사실이 허구화되어 독자나 관객에게 보여진다는 암묵적 동의의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이다. 그런데 유미리가 구태여 소설 속에 영화를 삽입하는 이중적 허구를 설정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족시네마'를 재독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여동생은, 그 드라마를 연출한 가타야마라는 디렉터가 영화를 기획하였는데, 주연으로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대단한데" 하고 일단은 축하했지만, 영화 그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그보다 왜 회사까지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석연치 않았다. 얘기를 계속하라고 채근하자 그녀는 "시나리오가 문제야, 영화는 시나리오로 결정나거든, 잡담삼아 우리 가족 이야기를 했더니 가타야마 자식, 흥분해 가지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그 경계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거야" 라고 단숨에 지껄여댔다.

위의 인용 부분을 보면, 영화 '가족시네마'의 연출자 '가타야마'는 주인공의 여동생에게서 가족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그 경계를 넘어서는'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며 강한 관심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 '가타야마'의 시선으로 본 이 가족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서기는 하지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시나리오가 된다. 주인공 가족에게는 평범할 수 있는, 일상이 돼 버린 서사가 가족 이외의 인물의 관점에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영화잖아"

어머니는 꼬집듯 말하며 내 팔에 젖가슴을 밀어붙였다. 마흔다섯 살 기념이라며 수치심 한 조각 보이지 않고 유방을 풍만하게 수술한 어머니. 그 실리콘의 감촉에 몸을 떨며, 누가 감독인 가타야마(片山)일까 싶어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는 순간, 분노가 온몸을 내달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째지는 소리를 내지르자, 모두들 전원이 나간 모터가 속도를 잃듯 동작을 멈추었다.

"컷"

하지만 당사자 이외의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자신의 삶이 촬영되거나 보여진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위 인용 부분에서 주인공 '모토미'는 자신 이외의 가족들의 동의하에 '가족시네마'가 촬영되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게 되고, 영화 촬영은 '컷'과 함께 일시 중단된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연출자의 지시에 의해 철저히 대본을 중심으로 인물들이 각자의 배역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데 비해, 이 영화는 연출진과 인물 역할 사이에 잡음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에 의해 실현되고 있는 주인공 '모토미'의 외부 시선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생겨난 것인데, 이는 유미리의 실제 '가족 이야기'를 관찰하는 외부의 사회적 시선과 맞닿아 있는 실제 생활의 일면과 유사하다.

어떤 가족이든 가족사에 얽힌 비밀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 가족은 너무나도 수수께끼투성이여서, 내 성(姓)인 유(柳)가 정말로 아버지의 성인지 의심할 정도이다. 아버지가 한국의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는 아버지의 친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친가에 비교하면 외가의 내력은 그나마 분명한 편이다. 전쟁이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혼자서 일본으로 건너왔고 파친코 가게를 차렸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할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할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일본에 건너왔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선을 봐서 아버지와 결혼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가게에서 파친코 가게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어머니한테 들은 것은 이렇게 아주 간단한 얘기밖에 없다.

유미리에게 있어 가족은 수수께끼의 의문투성이인 '핏줄'이다. 유미리는 '핏줄'에 대한 집념을 보이면서도 불안정하고 근원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균열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영화촬영에 몰두하는 연출 스태프들에게 그녀의 처절한 가족 현실은 다만 촬영의 대상이자 관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기계적인 작업 대상인 것이다.

"내가 잘못했고, 사과하지, 당신 말대로야."

비통한 목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많이 빠져 핑크빛 속살이 들여다보인다.

…중략…

"웃기지 말아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가 무슨 사과예요. 기가 막혀서!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집을 나갔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눈물이 뺨에서 턱을 타고 테이블로 떨어지고, 어머니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 울었다.

"컷! 어머니, 너무 빨리 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가타야마가 어머니를 쏘아본다.

…중략…

"아시겠어요, 어머니. 격렬하게 말다툼을 하고, 엉겨붙어 서로 치고받고 싸움을 한 다음에, 하루라도 가족을 잊어 본 날이 없다고 소리친 다음에 우는 겁니다. 아버님도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 다음이잖습니까?"

아버지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똑바로 가탸아마를 응시하고 있다. 가타야마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톡톡 상냥하게 두드렸다.

촬영되는 가족 모습과 일상적 삶 속에서의 모습 
공감·조화 이루지 못하고 경계하는 시선만 확인


"하지만 두 분 다 연기는 일품입니다, 아주 좋아요. 앞으로가 진짜니까, 열심히 해 주십시오."

관찰하는 주체들은 관찰되는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하고 보여지는 풍경으로 모토미 가족을 관찰할 뿐이다. 그 가족의 삶이 증오로 분열이 되어 있든지 내밀하고 진솔한 심정을 쏟아내든지 관계없이 냉정하게 고요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허구 영화를 위해 실제 가족이 모였다. 실제 가족이 허구의 가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토미 가족은 '카메라-on' 상태에서 배역에 충실하게 영화 촬영에 임하다가도 실제 가족의 서사로 분리되어 나와 가족이 당면한 해체 현실의 해결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도리어 '카메라-off' 상태에서는 현재의 현실 상황을 잊고 영화 촬영의 허구 가족 제작에 몰두한다. 그리고 분열된 가족의 근본적인 문제점 해결에 충실하지 못하고, 여전히 대립된 시각을 유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허구적인 '가족시네마'를 촬영하는 '카메라-on' 상태에서 가족에 대한 각자의 진솔한 생각이 많이 드러난다. 아마추어 가족의 연기로 인해 카메라는 가족 구성원의 진심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카메라는 1차적으로 허구적인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촬영 스태프의 시선이면서 나아가 실재하는 재일 조선인 가족을 지켜보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배타적 세계의 시선이 된다. 어느 쪽이든 이 가족의 사연에 진실로 감응하지 않고 오로지 경계하거나 관찰하는 시선이 되는 것이다.

3. 마주하는 시선과 배제되는 서사

'가족시네마'는 모토미를 주인공으로 하여 사건을 진행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사건의 전모를 1인칭의 시선으로 전달하고 있다. 대개의 1인칭 주인공의 인물이 사건을 서술할 때에는 주인공이 사건의 주체적인 위치에서 이끌어 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모토미를 둘러싼 인물들에 의해 중심적 사건이 진행되고, 서술자는 다만 그들의 대화와 행동을 묘사하는 위치에서 서사를 진행시키는 객체적 위치에 있다. 결국 주인공은 관찰되고 보여지는 인물로서 위치하는 것이다.

노인은 어느 틈엔가 손에 든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프레임을 들여다보며, 내 하반신의 움직임을 좇고 있다. 지퍼를 내리고, 청바지와 팬티 고무를 한꺼번에 잡고 내려, 한쪽 다리씩 들고 벗는다.

창문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지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의자에 눈길을 쏟으며, 배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렌즈를 들여다보며, 내 엉덩이를 쏘아보는 거뭇거뭇 번뜩이는 동공. 엉덩이께로 쑤시는 듯 찌르는 듯 뜨끈뜨끈한 통증을 느낀다.

플래시가 터지고, 순간 주위가 밝아지면서 발이 휘청하였다. 노인은 엉덩이를 필름에 각인하고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위의 인용된 부분에서 내밀한 육체를 보이면서 '모토미'는 통증을 느낀다. 단순한 수치스러움과는 다른 무언가 일상화되어 있는 이 사회의 질서 속에서 감각하는 고통인 것이다. 모토미가 노인(후카미)의 비상식적인 관찰 행위에 맞서지 못하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의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상화된 사회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약된 육체로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후카미'의 시선 또한 일상적이다. 모토미의 육체를 관찰하면서 신기하고 특별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오로지 사진 촬영과 관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모토미에 대한 어떠한 감정 교류 없이 사업의 계약자로서, 그리고 고용된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객관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눈에는 냉담한 빛이 가득하고, 입가는 이 사태를 재미있어 하고 있다. 후카미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나를 내쫓으려 했다.

"시계 같은 거 필요 없잖아."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 생각하면서 이 자리를 모면할 계기를 잡으려 안달하였다. 손목시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이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지낸 순간 순간이 부글부글 끓어 넘쳐, 나는 벽장 문을 열었다.

시계는 고무 보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잔을 손에 쥐고 다가온 여자의 눈이 빛나고, 턱선이 딱딱해졌다. 나는 시계를 주워 신발을 신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조용히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고, 바로 또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다리는 자신있게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이걸로 너도 혼자가 된 거야, 집을 빠져 나온 거라구.'

문을 밀자 그냥 열렸다. 아무도 없다, 교정도 건물도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지금도 봄방학 중이라는 사실이 숨이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죄었다.

위의 인용 부분은 모토미가 후카미의 내연녀를 발견하고, 시계를 찾으러 왔다고 핑계 대는 모토미를 후카미가 냉정하게 내쫓는 내용이다. 회사 일과 관련하여 모토미가 후카미를 만나긴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동거하며 애정을 느끼던 사이라고 믿고 있던 모토미에게 후카미는 냉혹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모토미는 후카미를 배려하여 '시계 찾기' 핑계를 대며 밖을 나오지만 길의 행로를 잊어버릴 만큼 정체성의 혼란을 맞는다. 연인 관계에서 모토미는 후카미에게 철저히 배제된 인물이었으며, 관찰의 유희로만 인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세계 속에서 '혼자'가 된다.

검정 래브라도 리트리버(뉴펀들랜드 원산의 사냥개)가 목을 돌리고 나를 보고 있다. 목걸이는 하고 있는데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강둑길에도 다리를 건너 도로로 나가는 길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불안이 명치께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 태세를 갖추고 있다. 개는 좋아하지만, 다리 한가운데 드러누워 있는 개보다는 차라리 죽은 개 쪽이 그나마 낫다. 잡종이라면 또 몰라도 래브라도 리트리버란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개는 나를 그저 바라볼 뿐, 그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다. 개라면 경계를 하든지, 아니면 무슨 기대라도 하면서 사람을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니 참을 수 없다.

위의 인용 부분은 모토미가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순종 개와 대면 상황의 이야기이다. '잡종'이면 몰라도 '뉴펀들랜드 원산의 사냥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개'의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개가 '경계'나 '기대'의 본연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자신을 관찰만 하고 있는 시선이다. 그러한 태도에 오히려 모토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관찰되는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후 굴복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그 순종 개에게 명령도 해 보지만, 이미 죽은 자기 가족의 개 잡종 '루이'의 비참한 최후의 환영만이 떠오를 뿐, 그 경계의 시선을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발걸음을 늦추고 펫숍 쇼 윈도를 들여다보았다. 성장한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가게 안 의자 위에서 발을 들썩거리고 있다. 뛰어내리는 지시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전에 보았던 그 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개의 개성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주인뿐이다. 코와 입을 가리고 한두 걸음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 남자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위가 쭉 쪼그라들어, 잰 걸음으로 가게를 떠나 후카미의 아파트로 향했다.

두 집 건너 안쪽 문 앞에서, 검정 고양이가 생선 대가리를 아작거리고 있다. 고양이는 내 시선을 느끼자 눈곱투성이 눈을 내 쪽으로 향하고, 우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등털을 곧추세웠다.

후카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위의 인용 부분에서 모토미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순종을 다시 만난다. 주인에게 잘 훈련되어 있는 그 개는 여전히 경계의 시선을 가지고 있고, 모토미 또한 '코와 입을 가리고 한두 걸음' 그의 곁으로 접근하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집착을 보인다. 이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반복행위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사라지는데, 후카미의 아파트로 향하는 길에서 일어난다. 후카미 집 근처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바로 검정 고양이의 시선이다. 고양이의 모토미를 향한 시선은 흡사 공포감을 조성하는 듯한 인물의 주관적 묘사가 두드러진다. 서술자는 동물들의 시선을 배타적인 이미지로 연출하고 있고, 그러한 이미지는 후카미 노인의 이미지와 반복 중첩되도록 서사의 앞뒤에 서술 내용을 위치시키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름이 나 있는 후카미 세이치' 노인과 재일 조선인 가족 '모토미'가 마주하는 시선과 결코 서로의 삶에서 합일점이나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배제의 서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작가 유미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여느 작가와 같이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세계 속의 자아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닮음의 서사가 배태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실제 작가의 가족 이야기와 유사한 '가족시네마'에는 카메라의 시선 아래 촬영되는 가족의 모습이 있고, 모토미의 일상적 삶 속에 주변과의 관계에서 생성된 시선이 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 두 시선은 모두 모토미 가족과 공감과 조화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시선이고, 다만 사회 질서의 틈새 속에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경계하는 시선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제3의 유형, 부유하는 삶

이미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재일 한국인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부모의 교육 방침에 따라 엄격하게 한국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민족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이름도 물론 한국 이름을 사용한다. 두 번째 유형은 국적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관계없이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자기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열심히 감추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외국인 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한국 이름으로 생활하고는 있으나 한국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

위의 인용 부분에서 유미리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1.5세대의 부모 아래서 자랐고, 일본 사회에서 3세대 재일 조선인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녀는 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작가라고 대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문제의식이나 민족적 문제의식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보는 논자가 여전히 많다.

재일 한인 문제나 한민족 문제 등과 같은 역사적 소재보다는 사랑, 섹스, 현대적 일탈, 연애풍속, 붕괴된 가족 등의 일상적 소재를 주로 다루는 작가로만 인식되고 있는 게 실상이다.

질문 시간에 그중 한 분이 일어나, 한국인이 훌륭한 상을 받아 기쁘며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어린 시절에 겪었던 차별을 작품에 그려 달라고 열심히 말씀하였습니다. 유미리 씨는 그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전했고요. 뜻밖의(?) 대답에 놀란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곳에 유미리 씨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저는 놀랐습니다. 유미리 씨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어요.

위의 인용 부분은 유미리의 세계관 및 민족에 대한 입장과 연관하여 1997년 서울의 한 대형서점 강연회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유미리는 '민족의 긍지'와 '차별'의 역사에 대해 작품을 써 달라는 독자에게 단호한 거부의 응답을 보낸다. 이는 재일 조선인 작가로서 유미리의 글에 담겨 있는 정체성에 대해 쉽사리 거대담론의 '민족, 국가, 혈통' 등의 논리로 끼워 맞춰 말하는 오류에 대해 반성하도록 하는 에피소드이다.

이 글에서 살피고자 노력한 것은 재일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유미리의 삶을, 그 삶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한 점이다. 그러기에 '가족시네마'의 형식적, 내적 질서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명확한 실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일 조선인의 삶에 드리워진 관찰하는 시선, 경계하는 시선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 아래에서 불안과 분노를 보이는 인물들의 군상을 살폈다. 유미리가 소설 속에서 '카메라'를 켜 들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보이려 한 것인지 다시금 고민할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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