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와 일상에서 건져 올린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민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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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소설가로 담백한 삶과 문학의 길을 걷고 있는 이규정 소설가와 그가 새로 낸 소설집 '치우'. 산지니 제공

최근 이규정 소설가와 두 차례 자리를 함께했다. 새로 낸 소설집 '치우(癡友)'(산지니)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문단 얘기가 오갔고, 올해 요산문학제에 작가들이 더 많이 참여하게 돼 "잘 됐다"는 말도 나눴다. 정작 소설집 얘기는 거의 없었다. 원로 소설가는 문학이니 인간정신이니 거창한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얘기들이 오갈 거라고 지레짐작했을 뿐 그저 담담한 자리였다.

'치우'를 마주하면 원로 소설가의 역할을 새삼 곱씹게 된다. 이 소설가는 3~4년에 한 권씩 책을 내 왔는데 이번 소설집은 7년이 걸렸다.

이번 소설집은 죽음이라는 인간문제를 다룬다. 소설집 속 죽음은 피하고 싶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고독하고 쓸쓸한 죽음을 앞두고 작중 인물들이 살아온 삶과 인간사들이 얽혀들 뿐. 여기서 죽음은 삶을 성찰하게 하거나 구원을 되묻는 고리로 작용하고, 원로 소설가의 원숙한 필력은 죽음 역시 생의 한 단면임을 설득력 있게 그려 내고 있다.

원로 소설가 이규정
7년 만에 소설집 '치우' 펴내
원숙한 글솜씨 돋보여


"나이도 있고 심장이 안 좋아 죽음 문제가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피하고 싶은 대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의식이 들었어요."

그리고 삶은 때로는 터무니없고, 잘못 흘러가지만 누구의 삶도 헛되지 않았음을 묘사해 낸다. 이 대목엔 원로 소설가가 직접 살아낸 삶과 경험이 풍부하게 더해진다. 죽음을 앞두고 가족 간에 벌어지는 소동이나 두려움, 살아온 삶의 후회나 회한 등 그 내밀한 감정을 그려 내는 것은 물론이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까지 속속들이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죽음은 죽음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 군상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한국현대사부터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까지를 입체적으로 다뤄 낸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풀지 못한 역사의 상처인 보도연맹 문제나 터무니없이 자행된 반공 문제, 연좌제를 단편 '치우'나 '폭설'로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풀꽃 화분'이나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같은 단편에서는 죽음과 마주하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읽어 내려 한 통찰이 담겼다.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로 살아온 소설가 개인의 삶이 반영된 '희망의 땅'이나 '작은 촛불 하나'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여태 소외 계층이나 사회 약자들 편에 서서 쓴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번 소설집엔 '희망의 땅'처럼 개인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도 있고, 보도연맹이나 연좌제 등을 다룬 이야기들도 저와 주변 사람이 직접 겪은 일들이에요. 모두 소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고민하는 소설들입니다."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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