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신춘문예-희곡] 드라마 / 최보영
등장 인물
김정수(75세) 방선자(73세)
당신 옛날 꿈 배우였잖우, 한 번 찍어 볼까요?
옷부터 입읍시다! 당신, 꼭 … 젊었을 때 같아
때비가 오는 여름날
무대
정수와 선자가 사는 6~7평 정도의 원룸
지난밤 자고 일어난 이불이 원룸의 반 이상 차지하고 깔려 있다.
무대 전면에 거대한 TV처럼 보이는 프레임이 걸려 있다.
무대 밝아지면
정수, 리모컨을 쥐고 버튼을 누르고 있다.
선자, 커튼을 살짝 걷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사이
정수 아 좀 비켜 봐.
선자 아우, 비가 많이 오네.
정수 자네가 딱 가리고 서 있으니까 리모컨이 안 되잖아.
선자 (몸을 살짝 비튼다) 해 봐요.
정수 (리모컨을 탁탁 치고 다시 버튼을 누른다)
아,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텔레비 켜진 거 맞아?
왜 온통 검어?
선자 빨간 불 들어와 있으면 꺼진 거잖우.
정수 빨간 불 없잖아.
번개 번쩍인다.
선자 빤짝하네. 곧 우르르 쾅쾅 하겠네.
정수 소나기라더니.
선자 소나기래요?
정수 응, 오늘 아침에. 6시 뉴스광장 1부에서.
선자 그럼 정확하겠네. 뉴스광장이 제일 잘 맞어.
아가씨도 참하고.
정수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테레비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선자, 정수의 옆으로 가 앉는다.
천둥소리 들린다.
선자 이리 줘 봐요.
정수 (리모컨 버튼을 마구 눌러 보며) 봐봐. 안 먹잖아.
선자 이리 줘 보라구요.
정수 자네가 한다고 되겠어?
(두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TV 가까이에 댄다) 이것 봐.
선자, 정수에게 리모컨을 뺏어
TV 바로 앞에서 리모컨을 눌러 보지만 안 된다.
선자 전지가 다 된 거 아니우?
정수 그런가?
정수 새 놈 끼워 봐.
선자, 리모컨 전지를 갈아 끼운다.
정수, 관심을 가지고 본다.
정수 아니, 돌려서 끼워야지.
선자 (어리둥절하더니 리모컨을 돌린다) 이렇게요?
정수 아니, 전지를!
선자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 뭘, 어떻게 돌리란 말이야.
정수, 선자에게서 리모컨을 뺏어 전지를 갈아 끼운다.
선자 아, 그렇게?
정수 그래!
선자 왜, 소리를 쳐요. 그런 거 가지고.
정수, 무시하고 리모컨을 누른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검은 화면이다.
정수 전지 문젠 아닌 거 같은데.
선자 (TV를 유심히 보더니) 이거 켜진 건데?
정수 응?
선자 테레비를 끄면 여기 빨간 불이 들어오고 켜면 여기 빨간 불이 꺼지더라고요.
근데 여기 지금 빨간 불이 꺼졌잖우?
정수 그럼 왜 암 것도 안 나와?
선자, TV를 탕탕 친다.
선자 (TV 주변을 살펴보더니) 저, 저것이 문제인 거 아닌가?
정수 뭐? 저거 유선방송에서 달아 준 거?
선자 응. 그거 없음 이제 테레비 못 본다고 그랬잖아요.
저게 고장난 거 아닌가?
정수 그러고 보니까 저기 적힌 글자도 다른 거 같은데.
선자 맞아요, 원래 퍼런 글씨로 '000' 적어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저게… 뭐라고 적힌 거요?
정수 영어고만, 영어.
선자 유선방송에 전화 좀 해 보는 게 어떠우.
정수 전화번호 모르는데.
선자 그때, 저거 달아 주고 간 사람이 명함 준 거 있잖아요.
번개가 번쩍거린다.
선자 꼭 사진이라도 찍는 거 같네.
정수 사진? (웃는다) 그러네.
정수, 서랍을 뒤진다.
정수 명함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
선자 천둥소리가 이제 좀 멀어졌네요.
정수 여기 있다. 이거 맞지?
선자 (명함을 살펴보고) 맞는 거 같아요.
정수 (전화를 걸며) 공일공…삼…이…오오…사… 뭐야 … 칠…구…칠
천둥 치는 소리.
정수 아, 여보시오? 거기 유선방송 맞는가? …
우리집 유선방송 달아 준 총각 아 니야? …
아, 그만 뒀어? 왜? 아…그럼 어떡하나.
테레비가 안 나오는데. 아 그래? 전화번호? 불러 줘요.
(선자에게) 얼른 받아 적어.
선자 자, 잠깐만. 종이, 종이.
정수 아, 잠깐만 종이 좀. 아! 빨리 좀 찾아 봐.
선자 종이, 종이가 어디 있더라.
정수 달력에 적으면 되잖아!
선자 그렇지. 근데 왜 소리를 쳐요!
정수 전화 끊어지잖아, 빨리. 적어. 총각 잠깐만.
선자 연필, 연필이 어디…,
정수 아이 답답해.
선자 (서랍을 뒤진다) 연필이 하나도 없네.
정수 총각, 좀만 기다려봐.
우리가 펜이랑 멀어진 지가 오래돼서 찾느라고….
선자 아! 루주, 루주로 쓸 테니까 부르라고 해요.
정수 불러! 총각. 루주로 쓴대. 일오칠칠….
선자, 달력에 커다랗게 받아 적는다.
정수 일오칠칠 삼구칠칠? 고맙네!
정수, 전화 끊는다.
정수 그렇게 크게 적으면 어떡해?
선자 잘 보이라고.
정수 날짜가 하나도 안 보이잖아. 달력을 볼 수가 없네!
선자 잘됐네. 어차피 달력 필요도 없잖아요.
정수, 달력에 적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긴 사이.
선자 안 받아요?
정수 (전화에 집중한다) 테레비는 3번.
(전화기 버튼을 꾹 누른다)
선자 뭐래요.
정수 아 잠깐만. 고장은 2번.
선자 안 받아요?
정수, 선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선자 뭐라고 하는구만, 안에서.
정수 (수화기를 들고 한참 기다리다)
뭔 노래만 나와!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고.
선자 그럼 좀만 더 기다려 봐요.
정수 받았다. (사이) 아니네, 노래가 다시 나오네.
선자 끊었다가 다시 해 보는 게 어떠우?
정수 좀만 더 기다려 보고.
사이.
선자 그냥 끊고 다시….
정수 아, 여보시오.
선자 받았어요?
정수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집 테레비가 안 나와서요.
(사이) 여기가 석관동 103번지 301… 아아 그래요?
선자 왜요.
정수 (선자에게) 딴 집도 다 안 나온대. (사이) 그럼 언제….
알겠습니다. 네.
정수, 전화를 끊는다.
선자 이 동네 테레비가 다 그렇대요?
정수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는 바람에 뭐 문제가 생겼대.
선자 그럼 고치러는 언제 온대요?
정수 거기서 노력하고 있으니까 좀 기다리면 나온다고.
선자 오늘 안에는 나온대요?
정수 나야, 모르지.
선자 … 이제 어떡하나. 집에서 가만히 앉아 할 일도 없는데.
정수 그러게. 낮잠이나 잘까.
선자 잠 오지도 않는데. 당신이나 한숨 주무시든지.
선자, 심심한지 손에 쥐고 있는 루주로 입술을 바른다.
선자, 거울을 보며 상념에 빠진다.
정수도 그런 선자를 바라본다.
정수 오랜만에 바르네.
선자 예뻐요?
정수 입술은.
선자 하여간 재미없는 양반.
(사이) 드라마도 못 보는데 우리가 한 번 찍어 볼까요?
정수 쓸데없는 소리.
선자 왜요, 못하란 법 있수? 당신 옛날 꿈이 배우였잖우.
정수 옛날 얘기지.
선자 애들 다 키우면 해 보겠다고 할 땐 언제구.
정수 너무 늙었어.
선자 왜요, 해 봅시다. 어제 연속극 예고편처럼.
테레비도 안 나오는데 우리라도 해 봅시다.
으응? 심심하잖어.
정수 연기도 못 하면서.
선자 허이고, 테레비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연기 못 허는 놈들 수두룩뻑쩍 헙디다.
정수 나는 감정 이입되는 인물이 없어서 못 해.
배우는 감정 이입이 필수걸랑.
그 사람들이 그냥 막 외워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드라마 같이 살아 봤어야 드라마를 찍지.
선자 당신은 그런 말도 못 들어 봤나.
진짜 인생이 더 드라마라고.
정수 사람 나름이지. 별것도 아닌 걸로 끙끙 앓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야.
선자 거 참. 마누라 한 번 맞춰 주면 안 되나.
정수 차라리 젊은 역할이라면 모를까.
선자 청춘 남녀요?
정수 응.
선자 못할 거 있나! 젊으면 더 좋지. 우리… 옷부터 입읍시다!
정수 응?
선자 이왕 할 거 배우들처럼 멋 좀 내 보자구요.
정수 뭘 입으라구.
선자 어디… 골라 드릴게.
선자, 장롱을 연다.
선자 이놈 입을까? 첫째 결혼식 때 입은 거.
정수 양복? 촌스러워. 옛날 거라.
선자 그럼 이건요?
선자, 옷 하나를 꺼내 정수의 몸에 대본다.
정수 이건 넷째가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사온
거라고 했던 거네.
선자 네. 비싼 옷 받아 놓고 아까워 입지도 못하고. 윗도리는 이걸로.
(사이) 당신한테 참 잘 어울려. 얼굴도 이쁘네.
정수 (쑥스러워)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무슨! 바지나 골라.
선자 바지는… 요거, 요거 어때. 다섯째가 명절에 사왔던 거.
정수 안 돼. 길어졌어.
선자 무슨 바지가 길어져.
정수 아, 길어졌다니까. 넘의 옷 입은 것마냥 보기 흉해. 못써.
선자, 다시 장롱을 뒤진다.
번개가 친다.
선자 이건요?… 근데 이건 어디서 났지? 처음 보는데?
정수 …막둥이가 사 온 거잖아.
선자 아…. 그놈, 스무 몇 살 땐가,
지 여자 친구 인사 오기 전날 사 온 건가?
정수 그래, 아빠 사이즈도 몰라서 영 작은 걸 사왔었잖아.
선자 그놈, 아들이란 게 아버지 사이즈도 모르고…. (사이) 이제 맞으려나.
사이. 천둥소리 들린다.
번개 치고 천둥소리 들리는 '사이'가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가까워진다.
정수, 멍하니 있더니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선자.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선자 당신이 옛날엔 풍채가 참 좋았는데.
이제 그 살이 다 빠져서.
정수 왜, 서운해? 옛날엔 살 빼라고 난리더니.
선자 다 술살이었으니까 그렇죠. … 다시 좀 쪄도 좋으련만.
정수 (바지 지퍼를 잠그며) 자꾸 빠지기만 하고.
나이가 드니 찌는 게 참 힘들어.
선자 바지 딱 맞구만.
정수 (웃으며) 막둥이가 살 빠질 줄 알고 요걸 사 온 모냥이네.
선자 당신 꼭… 젊었을 때 같아.
정수 포 터트리지 말어. 젊긴 무슨.
선자 포 아니고 진짜라니까요. 옛날 같어.
그때 당신이 참 커 보였는데.
정수 커 보이긴 뭐가. 나는 원래부터 키가 작았는데.
선자 아냐, 멋져. 정말 배우 같어. 당신 배우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 걸 그랬어. 내가 부득부득 못하게 해서.
정수 잘 됐어. 해서 뭐해. 집안 말아먹지만 않았음 다행이지.
선자 그때 당신 정말 잘났었어.
정수 말은.
선자 그때는 나도 좀 괜찮았지. 안 그랬수? 말해 봐요.
정수 (말 돌린다) 자넨 뭘 입을 거야?
선자 예나 지금이나 칭찬 못 하는 건 안 변하네!
정수 옷이나 골라. (옷장을 뒤진다)
자네도 마땅한 옷 하나 없지?
정수, 빨간 치마를 고른다.
번개가 친다.
정수 이거 어때? 색이 참 곱네.
당신 젊었을 때 이거 자주 입었잖아.
선자 이 나이에 야시시하게, 그 색을 어떻게 입어요.
정수 뭐 어때. 나도 이거 입었는데.
선자 아, 그래도 그건 싫어요. 비도 오는데 미친년 같어.
천둥소리.
정수 이건?
선자 양장이요? 당신은 청바진데 나도 어울리는 거 고를래. 예쁜 것 좀 골라 봐요.
정수 아직도 예쁜 게 좋나 그래?
선자 당연하지. 여자는 평생 여자라고 못 들어봤수?
정수 평생은 무슨. 남편 있을 때나 여자야.
나 죽으면 여자 노릇 할 곳이나 있남?
선자 죽긴, 벨 쓸데없는 소릴. 죽을람 죽으라지.
새로 시집이나 가지 뭐.
정수, 원피스를 꺼낸다.
정수 한 번 입어 봐. 새로 시집가려면.
선자 이거는 저번에 넷째 네가 두고 간 옷이잖아요. 애들 걸. 됐어요.
정수 넷째랑 덩치도 비슷하잖아. 맞는지만 봐봐.
선자 그럼 맞는지만 볼까.
선자, 옷을 갈아입는다.
선자 색은 예쁘네. … 여기 지퍼 좀 올려 줘요.
정수, 지퍼를 올리면 선자, 숨을 훅 들이마신다.
정수 딱이네 딱!
선자 (한 바퀴 돈다) 어울려요?
정수 징그러.
선자 벗을래요.
정수 됐어. … 예뻐. 젊었을 적 같어.
사이.
선자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손으로 빗는다. 사이)
화장도 좀 할까?
선자, 앉아서 화장을 한다.
정수, 그 모습을 지켜본다.
정수 자네도 많이 늙었네.
선자 그럼 안 늙어요? 나이만 먹고 얼굴은 그대로면 무섭게?
(사이) 젖통도 다 처지고… 예뻤는데.
정수 그럼, 동글동글 복숭아처럼 예뻤지.
선자 (화장을 마친다) 다행이우. 당신이 기억해줘서.
(사이) 알몸 사진이라도 남겨 둘 걸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