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 카를로 긴즈부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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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문화, 어떻게 '마녀'로 둔갑했나

16세기초 가일러 폰 카이저스베르크의 설교집 '에마이스' 중 삽화.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조한욱 옮김/길/2만원)는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 조류를 만들어낸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최초 저작이다.

그는 1966년 스물 일곱의 나이로 이 책을 선보이며 미시사의 태동을 알렸다. 그가 주창한 '미시사'란 거대집단이나 인물을 역사의 주체로 삼아 큰 줄기를 세우는 프랑스 아날학파 등 '거시사'에 대항하는 역사적 분과. 그는 '거시사'가 개개인의 구체적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균화시키는 데 불만을 품고,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삶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론을 찾아나선 것이다.

책은 그의 첫 작업으로 16세기 후반 유럽 변두리의 민간신앙이 기독교 강압 속에서 굴절되고 왜곡되어 마침내 소멸해 버린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1976년 출간된 그의 대표작인 '치즈와 구더기'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 의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종교재판을 받은 농민들의 이단 심문 기록. 그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지역의 농민 심문 기록에 등장한 실명의 개인들을 등장시켜,중세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마녀'와 '마녀사냥'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마녀라고 하면 성적(性的) 회합을 통해 난교를 벌이고,악을 불러들여 공동체 질서를 깬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당대의 '마녀사냥'은 엘리트문화와 민중문화의 충돌 결과였다고 한다.

1575년 이후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지역에서 상당수 농민들이 이단 심문관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1년 중 계절이 바뀌는 목요일 밤마다 악에 대항하는 농민세력,즉 '베난단티'가 마법사와 마녀들에 대항해 싸움을 벌인다. 사악한 일을 하는 남자와 여자는 들에서 자라는 수숫대를 사용하고,베난단티 남자와 여자는 회향 줄기를 사용한다. 농민들은 베난단티가 이기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마법사와 마녀들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당시 농민들은 가톨릭의 엘리트 문화와는 별도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

그런데 1618년,이 둘의 문화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심문에 응한 마리아 판초니는 자신이 베난단티라고 밝히면서 이것이 '악마'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15명의 마녀 이름을 댔다.

농민들의 민중문화가 갖는 이교도적 성격을 용납할 수 없었던 엘리트 계층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교회는 이 사건을 기독교를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하면서 베난단티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거듭되는 이단 재판과 기독교 논리 속에서 농민들은 독특한 종교적 심상과 민중문화를 잃고 말았던 것.

민중적인 성격의 신앙이 이단 심문의 압박 아래 마법으로 둔갑하고 마는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지금은 사라진 민중문화의 독자성과 생명력을 역설하는 한편 하부문화를 '이단'으로 규정해 탄압하는 지배층의 횡포를 고발하는 듯하다.

저작이 주는 무게 때문에 자칫 딱딱할 듯싶지만 개인들의 구체적인 증언담 덕분에 책은 옛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김아영기자 ye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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