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순교자 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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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 / 이충렬

는 성(聖)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삶과 순교신앙을 충실히 복원한 첫 정본 전기다. 한국 천주교회 연구기관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감수를 받아 펴낸 공식적인 전기다. ‘성(聖)’은 김대건이 1984년 가톨릭 성인으로 선포됐다는 것을 뜻하는데 당시 성인으로 선포된 103위 순교자들 가운데 대표적 성인이 김대건이다.

책은 김대건의 불확실했던 5년 반 동안의 마카오 신학교 생활을 명확히 밝혔다.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신부가 되었음을 친필로 서약한 ‘김대건 신부 서약서’도 교황청을 통해 입수해 170여 년 만에 처음 공개한다. 김대건은 당대 조선의 천주교 신앙을 집약한 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에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증조부, 종조부, 진외조부, 그리고 아버지가 순교했다. 그 씨 뿌림에 토양에서 김대건의 순교가 나왔던 거다.

삶과 순교신앙 복원한 첫 정본 전기
증조부·종조부·아버지도 모두 순교

김대건은 마카오를 향해 떠난 15세 이후 동아시아를 종횡하는 신앙의 고된 대장정에 들어섰다. 1836~37년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6개월에 걸쳐 한양-만주-북경-남경-마카오에 이르는 9000리 길을 걸어서 갔다.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1842~45년 만주에 이르러 수천 리를 오가며 추위 굶주림 병고와 싸우면서 다섯 번에 걸쳐 조선 귀국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여섯 번째로 평양을 거쳐 한양에 왔던 게 1845년이었다.

김대건은 주어진 사명대로 중국의 외국인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바닷길을 개척하는 임무에 나섰다. 그는 마포포구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조선의 첫 사제로서 사제 서품을 받고 상하이에서 외국인 신부 2명 등과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V랑 속에서 제주도를 마주한 남쪽 어느 섬까지 표류한 뒤 겨우 살아났다.

그 이듬해 1846년 6월 체포될 때까지 김대건이 사제로서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7~8개월여로 짧았다. 그는 순교의 땅에 순교의 씨앗으로 뿌려질 참이었다. 김대건은 그해 9월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25세였다. 헌종 12년이었다. 김대건의 마지막 말이다. “그럼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나는 이제 천당으로 올라가 지금처럼 당신들을 보게 될 것이오. 여러분도 천주교인이 되어 나와 함께 있도록 하시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왔던 페레올 주교는 1853년 한양에서 선종했고, 다블뤼 신부는 주교가 되어 조선대목구장을 승계한 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동서양의 구분이 있다고 하고, 서학에 맞서 동학이 일어났으나 서학 또한 저 가혹한 피 흘림의 순교를 통해 서서히 조선의 것으로 토착화했다. 2019년 유네스코 총회는 김대건 신부를 2021년 동서양 구분을 넘어선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김대건 신부는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라고 했다.

이 책은 김수환 전형필 최순우 김홍도 김환기 권정생 이태석 등의 전기를 집필한 이충렬 작가가 2년 동안 쓴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가 감수했다. 이충렬 지음/김영사/544쪽/2만 5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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