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김지하와 휘트먼, 민주주의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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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오월의 신록이 햇살 아래 싱그럽다.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은 흰 꽃을 피운다. 은은한 보랏빛 라일락을 보면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이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가 생각난다. 민주주의는 젊은 청춘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세계 곳곳에 그들의 희생이 스며 있다. 아직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한 채 전쟁터로 호출된 러시아 병사의 슬픈 시체도 밀밭에 버려져 있다. 내년 봄에는 우크라이나 들판에 노란 해바라기가 다시 피어날 것이다.

5월 8일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지하 시인이 타계했다. 1980년대 최루탄 냄새가 찌든 대학가에 울려 퍼지던 노래 중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는 참으로 애절했다.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가 독방에 갇혀 쓴 시여서 더 간절한 느낌이 들었다. 1975년 민주주의에 목말랐던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시이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는 가사는 늘 귓전을 맴돌았다. 그가 정치범으로 내몰려 독방에 오랫동안 감금되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왔다.

김지하 저항적 민중시 한국 시단 큰 획
말년에는 거대한 생명사상으로 나아가
월트 휘트먼, 미국 시단의 정신적 지주
자유 등 민주 국가 이상 강렬하게 표현 

<오적>을 비롯한 여러 시집에서 저항적 민중시의 큰 획을 그은 시인이 지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안타까웠다. 후기에 그는 저항시보다는 불교, 샤머니즘, 동학 등이 융합된 생명사상을 주창하기도 했다. 말년에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화해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진보주의 측에서 그가 변절했다는 비난도 있었다. 한편 김지하의 내면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히고 병을 치료해 준 김남수 선생과의 일화도 흥미롭다. 정식적인 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침뜸의 대가였던 그가 단순히 김지하의 몸만 치료하지 않고 마음까지 돌본 것은 주목할 만했다. 시대의 모순과 불의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고 부딪친 불꽃 같은 영혼이었지만 인간적인 결함도 있었을 것이다. 나약하고 안쓰러워 돌보아 주고픈 한 남자였다는 아내 김영주의 고백은 감동이었다.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와 김남주의 시 ‘조국은 하나다’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Liberte)’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심경을 표현했고, ‘나는 쓰노라 네 이름을’이라는 시구의 반복이 닮은 점이 있다. 그렇지만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조는 차이가 많이 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던 엘뤼아르의 시 보다 김지하의 시는 더 강렬한 에너지와 절규를 담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인의 열망은 독특한 시대 상황과 부응하며 조금씩 다른 빛깔로 표현된다.

미국에서는 19세기의 월트 휘트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풀잎>이란 시집을 1855년에 출간한 이후 계속해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다. 그가 첫 시집을 발표했을 당시에 유럽과 미국의 기성 문인들은 “쓰레기통에 던져도 될 시집”이라는 혹평을 쏟아 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시의 형식이 파괴되고 금기시되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휘트먼의 시는 미국 시단에서 굳건한 정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가 기틀을 다질 시기에 정신적 토대가 되어 주고 사유의 확장을 꾀한 측면에서 압도적이다. 솔직히 그의 시적 운율이 아주 아름답거나 우아한 품격이 있지는 않다.

휘트먼 역시 ‘너를 위하여, 아 민주주의여’에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성처럼 섬겨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는 팔로 서로의 목을 껴안고 헤어지지 않는 도시를 건설하리라/동지의 사랑으로/동지의 남자다운 사랑으로//아, 민주주의여, 나의 여인이여! 너를 섬기기 위해 이것들을 바친다/당신을 위해, 나는 이 노래를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네.’ 그는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운동을 지지했고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을 활기찬 어조로 표현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을 파도의 푸른 물결처럼 끊임없이 읊조린다. 그는 일부 시편에서는 동성애적인 묘사도 서슴없이 표현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거침이 없는 예언자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는 시민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의 나무처럼 성장함을 새삼 느낀다. 한국에 김지하 같은 열정적인 시인이 있음에 자부심을 갖는다. 시가 현실에서 큰 힘이 없지만 정신에 각인하는 위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자유가 억압받는 국가에서 시민들이 용기 있게 깨어나도록 선도할 예언가 시인들이 출현하기를 희망한다. 자유는 피만큼 뜨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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