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손흥민을 손흥민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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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지난 일요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2021~2022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렸고, 한국인들의 관심은 한 경기에 쏠리고 있었다. 경기 팀인 토트넘 홋스퍼는 4위까지 허락하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다투고 있었다. 동시에 이 경기에는 득점왕에 도전하는 한 선수도 출전하고 있었다. 과연 이 선수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득점왕 타이틀을 딸 수 있을 지는 현지 축구 전문가와 세계의 열혈팬들 사이에서도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 선수는 손흥민이었다.

손흥민 득점왕 등극 자랑스러워
하지만 국수적인 평가는 경계해야
 
미나리 등 한국 콘텐츠도 인기몰이
역시 과도한 맹신이나 자랑 이어져
열등감 보상 도구 삼는 일 경계해야

이 경기는 큰 감회를 불러왔다. 한국인으로서 그 어려운 리그에서 최우수 선수 반열에 오르고 소속팀을 최고의 리그에 입성시키는 역할을 지켜보는 일이, 자랑스러움과 가슴 벅참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공유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나는 성과 뒤에 가려진 이면도 적지 않았다. 북런던 연고팀이라는 어드벤티지는 지금은 든든한 배경일 수는 있지만, 데뷔 초만 해도 인종과 민족의 차이를 실감하게 하는 난관으로도 작용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민감한 사안으로 떠오르기 일쑤였고, 현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팬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차별, 과소평가, 상대적 불이익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과도한 기대감과 뒤따르는 실망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손흥민은 집요한 폄하나 집착 혹은 터무니 혹평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손흥민을 둘러싼 논란과 시각은 소위 선진국을 대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한다. 손흥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성취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밖에 없지만, 그를 통해 한국 축구가 일본 등을 능가했다거나 한국의 축구가 선진 축구의 반열에 올랐다는 식의 국수적인 주장이 횡행하는 일은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식민지를 거쳤고 서양 문화와 힘에 압도당한 경험이 있으며 이웃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는 현재 처지를 과도하게 의식하여 그 극복책으로 손흥민을 앞세우는 태도 역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한국 콘텐츠에 대한 맹신이나 과도한 자랑에서도 발견된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에 대한 전 세계적 열광이 그 자체로 한국의 우월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별 작품의 우수성과 만든 이들의 땀방울을, 함부로 전체주의 영광이나 국수적인 우월감과 뒤바꿔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영광과 찬사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도 나타난 바 있고, 그들 역시 어느 순간에는 자국의 스포츠 혹은 콘텐츠가 세계를 정복했다는 식의 만족감으로 무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힘과 영광은 정복감에 있지 않았으며, 자기 과신이 주요 성과에 깊게 관여하는 순간 역시 길지 않았음을 또한 살펴야 할 것이다. 손흥민은 손흥민이고, <기생충>은 <기생충>일 따름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득점왕에 취해 손흥민의 성취를 마냥 부풀리는 일이 아니며, <기생충>을 자랑하며 손을 놓는 일도 아니다.

축구는 다시 시작될 것이고 한국 영화는 또 다른 작품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손흥민을 응원할 것이다. 그가 한 명의 축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며, 남다른 관심으로 그의 성공을 기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찬사가 동아시아 다른 국가나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될 수는 없다. 조용히 지켜보는 것과 과도한 의미 부여는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 손흥민은 분명 자랑스러운 상징으로 남겠지만, 그 누구와 비교되어 우수성을 입증해야 할 무언가로 남을 수는 없다. 그의 성실함과 희생과 겸손함을 올곧게 지켜본 이라면, 더 그러해야 할 것이다. 손흥민은 더도 덜도 아닌 손흥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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