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테크노포퓰리즘과 ‘역대급’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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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2022년 대선에서 특기할 점으로 이른바 ‘좌파’ 의제의 실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민주당을 ‘좌파 정당’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런 평가는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집권 기간 동안에 보여 준 정책 결정들을 좌파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그럽게 봐줘도 민망하다. 아무리 좌우가 편의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국제 표준에 비춰 보면 한국의 정치 지형은 보수 양당의 대립 구도에 가깝다.

일부 자칭 ‘우파’ 유튜버들이나 극렬 민주당 지지자들을 제외한다면, 이번 대선을 좌우의 대결로 생각하는 유권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대선은 이런 이념의 차별성을 삭제하면서 전면화한 ‘세대’와 ‘젠더’라는 정체성 주장이 정치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양상이다. 정의당과 기타 소수 정당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들이 제기하는 의제들은 전혀 진지한 관심의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탈정치의 표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대선 정국에서 쟁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는 개별 후보의 결격 사유를 부각시키는 네거티브 선전전일 수밖에 없다.

좌우의 이념적 차별성이 삭제된 선거
엘리트주의에 ‘국민 통합’ 논리 기묘한 결합
전망 자체가 사라지는 탈정치의 아수라장

그럼에도 이런 정치 실종의 상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 다시 말해서 두 보수 세력을 거부하는 대안의 의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징후적인 사태라고 할 만하다. 모두가 동의하는 ‘역대급’ 선거의 양상은 단순하게 해당 후보의 타락이나 부패로 환원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만 갖고 그러냐”는 말은 모두가 그렇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생각’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여러 진단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번 선거의 양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요인 중 하나로 ‘테크노포퓰리즘’을 지목하고 싶다. 이 용어는 2021년 옥스퍼드대학 출판사가 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토프 비커턴과 카를로 인베르니치 아세티는 그동안 대립적인 관계로 보였던 테크노크라시와 포퓰리즘을 하나로 결합한 양상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논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 이를테면, 전문가주의를 무시하고 포퓰리즘이 난무하는 기성정치에 대한 개탄과 결을 달리하는 입장이다.

교과서적으로 보면, 테크노크라시라는 것은 전문성을 갖춘 대표들의 숙의를 통해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작동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는 동료 전문가들끼리 이루어지는 상호 평가이다. 이른바 여론의 향방에 따라 특정한 결정사항이 뒤집히는 것은 테크노크라시를 무너뜨리는 위험 요소이다. 한편 포퓰리즘은 테크노크라시의 전문가 숙의 결정 시스템에 반하는 입장이다.

다분히 부정적 뉘앙스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요소는 엘리트의 결정을 대체하는 ‘국민’의 뜻이다. 포퓰리즘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포퓰리스트들은 언제나 국가와 정치를 통한 ‘사회 통합’을 역설한다. 본인들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엘리트들이 분열시킨 진영주의를 극복하고 국민 모두 하나가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은 만국 공통이다.

그렇다면, 이런 테크노크라시의 양상과 포퓰리즘의 양상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결합해 있는 테크노포퓰리즘은 어떤 특징을 띠는 것일까. 새롭게 부상한 이 정치 논리는 자신들을 좌도 우도 아닌 ‘순수한 신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수사가 아닌가. 저자들은 유럽의 국가들에서 최근 드러나는 양상들, 예를 들어, 영국의 노동당이나 프랑스의 마크롱,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등을 통해 이런 테크노포퓰리즘을 개념화하고 있지만, 한국의 정치 현실 역시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테크노포퓰리즘에 부합하는 첫 사례는 아마도 ‘안철수 현상’이었겠지만, 탄핵 이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 역시 표면적으로 내세운 기조는 숙의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다운 나라’였다는 점에서 이 사례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야당 후보 역시 전문성을 결여한 아마추어 정부가 나라를 망쳤고 그래서 자신이 집권하면 사분오열된 사회를 통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프레임은 동일하다.

테크노포퓰리즘의 출현은 특정 정부나 정치인의 인격이나 성향에 따른 결과라기보다 이 자체가 정치의 소멸을 보여 주는 징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정치의 소멸은 그 명분으로 항상 거론되었던 테크노크라시에 대한 전망 역시 붕괴시켰다. 정치의 전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탈정치의 아수라장 사태가 바로 ‘역대급 대선’의 비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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