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태종대로 가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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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길재. 낙향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언급하는 선비의 감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가는 길에서는 습관처럼 이 시조를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태종대로 가는 길에 뜬금없이 조지훈의 시 ‘승무’가 떠오른 것은 의외였다. 바다 풍경이 시와 연관되었다기보다는, 시어 중의 한 단어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이 시를 간간이 외우는 이유도 ‘외씨버선’, 그 말 때문일지도 모른다.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이하 생략)’-조지훈의 ‘승무’.

조지훈 시 ‘승무’ 속 ‘외씨버선’
어머니 버선코의 미학 떠올라

아파트 욕망 이어진 영도 해안
섬세하게 다뤄야 할 도시의 끝
우리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나는 버선을 외씨(오이의 씨) 모양으로 관찰한 시인의 탁월함에 주목하였다. 기억 속 어머니의 버선도 하얀 외씨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버선코는 압권이었다. 발목에서 시작한 완만한 곡선이 엄지발 끝에 이르러, 과하지 않은 길이와 각도로 하늘을 향해 살짝 치켜들면서 버선의 곡선은 끝이 났다. 어머니의 발치에서 그 끝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아파트 건설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 영도 해안가를 지나면서 나는 시를 외우기도 하고, 도시의 두 얼굴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발전이란 운행 속에서의 변모와 그럼에도 나의 추억 따위를 불러내 주어야 하는 도시의 복합성에 대하여. 이곳도 많이 바뀌었구나. 나는 추억을 찾으려 도시의 끝쪽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도시를 탐색하는 중인가?

도시의 품은 늘 내 어머니와 같았고, 나는 버선의 끝으로 향하려는가? 마침내 나는 태종대에 다다르고, 도시의 끝을 다시 생각하였다. 어머니 외씨버선의 선이 허공의 어느 점에서 머물 듯, 땅이 흐르다가 마침내 바다와 맞닥뜨려야 하는 곳. 인간이 이룬 인공의 것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불가항력이 되는 그런 지점에 대하여. 그 끝의 환상이 오늘 나를 바다로 불러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케이프타운’, ‘땅끝마을’, ‘호미곶’과 같은 그런 이방의 풍경조차 그리워하였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새해 벽두 첫 해를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 해가 슬며시 바다로 스며들어 다음 운행을 준비하는 의미를 목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때론 찌든 도시의 노곤함을 버리고 다시 생의 불을 지피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아~ 땅의 끝을 지닌 이 도시는 얼마나 축복인가? 나는 들판에 세워진 도시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리하여 도시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 도시의 끝 지점에서만큼은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접점은 마치 시인이 시어를 창조하듯, 곱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곳은 외씨버선의 선이 허공을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지나친 각도를 가지지 않아야 하며, 무거운 크기여서도 안된다. 그것의 끝이 향하는 하늘의 색과 그들의 조우가 일으킬 바람과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사람들이 느낄 설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도시의 끝을 다루는 우리의 솜씨가 그러지 못하였기에 나는 늘 안타까웠다. 오래전, 몰운대 뒤편에 거대한 아파트 군집이 들어설 때 그랬고, 오륙도 앞에 병풍처럼 아파트가 펼쳐질 때도 그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곧이어 해운대, 송도, 남천동의 끝자락에도 여지없이 거대한 아파트들이 무례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도시의 끝 지점들은 새로운 출발점이 아니라 정말로 끝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오호~ 이곳 동삼동의 끝자락도 말이 아니구나. 풍경을 독점하려는 거대 아파트의 욕망 때문에 아치섬, 태종대, 오륙도, 그 아름다운 것들의 모습이 참 초라해졌구나. 내가 이곳에 와야 할 일이 점점 줄어들겠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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