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어머니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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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품을 떠나 사는 자식 둘을 생각하면 언제나 걱정이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춥게 지내지나 않는지. 이 녀석들이 특별히 말썽을 부린다던가 못난 짓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저 걱정이니 이게 부모 마음이 아닐까 싶다. 자식 걱정에 마음이 심란할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엄마도 우리 형제들 키우실 때 이랬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전화 내용은 늘 같다. “엄마, 뭐 하세요?” 최근엔 귀가 잘 들리지 않은지 동문서답 통화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잘 계시는 걸 확인하면 안심하고 전화를 끊는다.

하물며 평범한 엄마와 딸, 자식 간에도 애끓는데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가 그랬다. 선생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꼭 이루어 주세요”라는 아들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사십 평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여성 노동운동가로 ‘어머니의 길’을 걷다 2011년 82세로 생을 마쳤다. 아들은 노동의 새벽을 열었고, 어머니는 그 새벽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불행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어머니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을 보며 ‘어머니란 존재는 정말 위대하구나‘를 절감했다.

지난 9일 82년 생을 마감한 배은심 선생 역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고 이한열 열사의 평범한 어머니에서 35년간 ‘민주화 투사’로 살다 가셨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촛불집회 등 민주화의 외침이 필요한 현장이라면 어디든 함께했다. “1987년의 그날 이후 나는 세월에 끌려가듯 살았다. (…) 한열이가 못다 만든 세상을 내가 이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막막하고 두려울 때는 한열이와 둘이 간다고 생각했다.”

자식의 유지를 이어받은 어머니의 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꿋꿋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배은심 선생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균이 장례식 등에서 뵈면서 자식 잃은 슬픔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꼭 묻고 싶었는데… 이젠 기회가 없네요.” 금쪽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이 투쟁의 대열에 속속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프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투쟁하면서 요구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민주유공자법)’ 제정에 힘을 보태면 좋겠다. 이제는 세상의 아들딸들이 나설 차례다.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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