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세밑 그리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전 고신대 총장

오래전부터 세밑만이라도 이 동네를 휙 떠날 심산이었다. 건물도 회색, 하늘빛도 회색, 사람들 마음도 회색, 온통 회색빛인 도시를 빠져나와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 차량 행렬 속으로 몸을 숨긴다. 쫓기듯 살아온 저 속에서의 삶, 어떻게 짊어졌는지도 모른 채 지고 왔던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허허로운 들판과 무심한 구름을 쳐다본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이렇게 사는 건 아닌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들녘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어두워져 가는 도로를 무심히 달리자 어두운 먼 기억 속에서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들이 뇌리로 파도처럼 몰려온다.

누가 내 글을 보고 “글이 아니라 그림”이라 했다. 그래서 난 “내 글은 그림이 아니라 그리움”이라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읊조리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도 실은 ‘가을’ 대신 ‘그리움’으로 바꿔야 할 듯하다. 그의 시들은 그리움의 호수에 풍덩 빠져 있다. 이 시에서도 고독했던 시인은 별을 헤면서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부른다.

유년의 향수를 좇아 누워 보는 고향집
한숨 자고 나면 또 한 해가 시작되겠지
산다는 건 짧은 하룻밤의 꿈 같은 것

어디 동주의 시만 그러하랴? 실로 내 글도 늘상 주체 못할 그리움의 바다를 헤매고 있다. 특히 이렇게 홀로 어두운 길을 가노라면 소스라치게 떠오르는 고운 얼굴선들과 맑은 눈동자들, 그 그리운 모습들이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소싯적 개구멍으로 만나던 소꿉친구 옥이, 우리 집에 살다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사는지 모르는 착한 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실, ‘일상의 도피자인 친구에게’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준 희. 그리고 이국땅에서는 어떠했던가. 시골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찾은 낡은 수녀원에서 창문을 열고 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며 손 흔들던 겔린데, 바이에른 숲속 어머니 무덤에 같이 가서 꽃에 물을 주던 마르타. 그녀는 집 정원에 달린 설익은 포도를 따 주면서 ‘한번 맛봐. 우리네 인생도 이것처럼 달기도 하고 떫기도 한 것이겠지’라고 했었다. 그뿐이던가. 노파가 검은 고양이와 홀로 살던 프뤼페닝 수도원을 오가며 휘영청 밝은 달빛 언덕을 넘나들던 독일 동무, 금요일 저녁마다 옥수수밭 위 벤치에서 저녁 안개 자욱한 옛 도시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던 미국 벗, 도나우 강가에 나란히 앉아 강물을 향해 피웅피웅 물수제비를 뜨던 조용한 이탈리아 친구, 강 너머 끝 모르는 숲길을 같이 걷다가 이름 모를 작은 계곡마을까지 갔던 얼굴이 하얀 영국 친구 등. 흔들거리고 빠른 시간의 열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다들 결코 잊은 적이 없는 보고픈 얼굴들이다.

내 마음과 글들은 이런 그리움의 바다를 헤매는 조각배 같다. 특히 고향은 내 그리움의 원천이다. 늘 가슴에 사무친 어머니, 하루 일과가 끝난 뒤에도 소에게 줄 꼴을 베겠다고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들녘으로 나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초라하지만 아늑했던 고향과 철없던 어린 시절은 영원한 그리움이다. 이제 그 고향집에 당도했다. 옆집 개평 아지매가 세상을 떠나고 시골집은 외딴 섬처럼 더 쓸쓸해졌다. 그 금빛 곡식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마을 앞 들녘은 가난해져 있었고,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에 밀려온 빠짝 마른 감 잎사귀들이 문만 열면 집으로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적막을 깨던 개소리도 사라지고, 긴 세월 집을 홀로 지켜 오던 마당의 늙은 무화과나무도 나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앙상한 몰골로 벌써 잠들어 있다.

그래도 방문을 열고 들어가 빛바랜 사진 속 어머님의 미소 띤 모습을 보니 금세 쓸쓸함이 사라졌다. 불 피우고 방 닦고 어머님 누우시던 낡은 요 위에 초라한 육신을 누이니 나그네 인생길 이런 쉼이 없다. 깊은 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내일 아침이면 장독대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짹짹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싶어 굴뚝새들은 둥지에 든 지 오래이다. 세상의 가장 슬픈 첼로곡 ‘자클린의 눈물’을 틀어 놓으니 푸른 달빛도 같이 감상하고 싶어 도둑고양이처럼 창문으로 휘영청 비집고 들어온다. 그 창문에 고독하게 살다가 요절한 자클린 뒤 프레의 애절한 눈빛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아, 이렇게 한숨 자다가 깨면 내일은 또 한 해의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몇 십 번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의 열차에서 하차하여 영원의 열차에 옮겨 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인생이란 짧은 하룻밤(Das Leben ist eine kurze Nacht)’이라는 경구를 읊조렸던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산다고 호들갑 떠는 것도 결국은 영원의 현실로 가기 전 잠시 꾸는 하룻밤 꿈이 아닐까?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