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다시 만난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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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 포스터.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박카스를 들이키며 밀려오는 졸음을 몰아내며 일을 했던 날도 수없이 많았다. ‘나’를 대신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일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내 가족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노동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스물두 살 ‘태일’이 목소리를 높인다. 노동자를 기계로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그의 외침은 근로준수법을 하찮게 여겼던 냉혹한 시대를 지나, 다시 우리 곁으로 왔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자신의 생을 온몸으로 바친 전태일. 교과서에서만 만났던 그 이름을 스크린으로 보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그의 짧은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감독의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막연히 가지고 있던 무겁고 어두운 노동자, 열사, 고뇌하는 청년, 암흑의 시대를 살다간 전태일의 이미지를 지운다. 영화 속 태일은 누군가의 아들로, 가난한 가족의 가장으로, 건강하고 밝은 청년 노동자로 되살아난다.

근로환경 개선 위한 투쟁과 분노
무겁게 재현 않는 애니메이션
스스로 불꽃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자극적 표현 대신 분신 추측하도록
 
아련한 정서 부르는 따듯한 그림체
부당해고 등 노동 현실 돌아보게 해

영화 초반에는 가난으로 뿔뿔이 흩어진 태일의 가족과 서울에서 다시 만난 가족이 안정을 찾는 모습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열아홉의 태일은 좀 더 많은 봉급과 나은 미래를 위해 재단사 보조로 취직하면서 청년 노동자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재단 보조로 일하던 태일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생각보다 빨리 재단사가 된다. 이제 기술도 배우고 월급도 올랐기에 부모님과 어린 동생을 행복하게 해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런데 나이 어린 여공들이 자꾸 눈에 밟혀 자신의 성공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사장이 재단사에게 돈을 주면, 재단사는 미싱사들에게 월급을 나눠주고, 미싱사들은 그 돈에서 얼마를 떼어 또 어린 시다들에게 나눠준다. 여공들은 그 돈마저 집으로 보내면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를 버틴다. 태일은 그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주고,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다주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여공들의 삶을 위로하지만 그 방법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바꿀 순 없다는 데 절망한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노동법이 있음을 알게 된 태일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근로 환경을 바꾸기 위한 투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폭력과 회유,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그들의 투쟁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투쟁의 실패와 그들의 분노를 애니메이션은 어렵거나 무겁게 재현하지 않는다. 즉 영화는 태일의 모습을 열사의 이미지보다는 이웃집 오빠처럼 평범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영화가 전태일 열사하면 떠오르는 분신 장면을 표현하는 방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꽃이 되기로 결심한 태일. 이때 영화는 태일이의 몸을 클로즈업 하지 않고, 저 멀리서 그의 분신을 추측하게 만든다. 영화는 태일이의 어린 시절부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도시 서울의 모습, 창문도 환기구도 없는 공장의 먼지가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장면은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면서도 아련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따듯한 그림체가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에 어렵지 않게 다가가게 만든다. 아마도 실사영화로 그 현실을 보았다면 눈 감아 버렸을 암울하고 비극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노동의 역사도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당해고와 노동자의 죽음이 무기력하게 방치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나은 노동현실에서 살고 있는지, 태일이를 보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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