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느린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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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2003년에 출간된 책 는 내게 적잖은 감동을 주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교환한 편지 혹은 수 차례의 현장 대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케치 된 그림들이 책의 주 내용이다. 건축주와 소통하며 느리게 건축을 이루어 가는 것이 어떤 건축가들에겐 꿈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은 이후 나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이 책을 기꺼이 소개하곤 하였다.

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유명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먼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에서 빵집을 하는 젊은 도노모리 부부로부터 설계를 의뢰받는 편지로 책은 시작된다. 작은 건물, 보잘것없는 설계비, 그리고 먼 출장. 인기 건축가에게 어울리지 않은 프로젝트임에도 선뜻 수락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짐작컨데 “설계비로 직원들이 평생 먹을 빵을 제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축주의 순수한 마음과 그 용기를 높이 산 건축가의 열정이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건축의 참된 의미 되새기게 하는 책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건축주와 소통 이뤄가는 과정 감동

시골서 카페·식당 여는 사람 늘어나
생활양식 변화 따라 건축 양태도 변모
느리지만 따듯한 건축 생각하는 계기



건축가들이 뒤늦게 깨우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건축의 참된 의미가 건축물로서의 결과이기보다는 건축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역설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이루어 놓은 건축은 ‘소박하다’는 말로써 평가되었지만, 이 소박함이란 형태나 재료, 혹은 공간의 크기나 질이 질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 씀씀이에서 빚어진 더 따듯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에게서 받은 편지를 차분히 읽어 나가듯 본 책이었다. 3D, 4D를 넘나드는 초스피드 시대를 살아야 하는 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느리게 펼쳐지는 이 동화 같은 스토리에 매료되었고, 이후 건축을 대하는 태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느 건축주가 시골에 식당을 짓겠다고 내게 전화하였다. 현장을 보러 시골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 책을 떠올렸다. 평생을 도시에서 건축을 이루어 온 나에게도 요시후미 교수와 같은 기회가 온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눈에 뜨이는 자동차 수가 줄어들고, 시야에 초록색의 양이 점점 많아진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오래이니 별로 특별할 것도 없으련만 건축주와의 첫 만남이 왠지 설렌다.

오래전 영화에서 본 프랑스 어느 마을이나 일본의 산골에서의 장면들도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카페나 식당을 차리겠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이나 ‘카모메 식당’, ‘리틀 포레스트’에서의 장면들에 대한 추억이 사람들을 시골로 불러들일까? “빵만 맛있으면 사람들은 어디든지 와요.” 시골에다 집을 짓겠다는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다. 소설 속의 도노모리 부부가 후시요미 교수에게 설계를 맡긴 용기와 자신감도 그런 것의 일종일까?

아무튼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 눈에 뜨이게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에 따라 건축의 양태도 많이 변모하였다. 특히 음식 레저 분야에서는 시간과 거리와 사람의 수로 결정되던 사업 패턴의 변화가 확연하다. 고급 카페나 음식점들이 차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깊은 시골에 들어서고, 사람들은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여 거기로 간다. 이제 사람들은 단기간에 목적을 달성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좀 더 느긋하게 음식과 레저를 즐기고자 한다.

시골로 향하는 건축가의 마음이 복잡하다. 초록이 지천이고 잠시만이라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질 거기. 나의 건축은 어떠해야 하나? 3D의 스피드를 버리고 느린 아날로그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아니면 처음 보는 건축주와 애틋하게 편지부터 나누어야 할까? 우선 차의 속도부터 줄여야겠다. 그래! 이제부터 느리지만 따듯한 건축. 그게 이번 프로젝트의 해답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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