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시와 만난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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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시인 지망생 ‘현실’은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고 말한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무언가 달라졌을까?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시(詩)를 읊는 현실. 온통 시 생각으로 가득 찬 현실을 만났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며 시간을 쏟아부었던 게 언제였더라. 현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되었더라? 미래가 암울하다고 울부짖는 청년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불편했다면, 김종재 감독의 ‘생각의 여름’은 유쾌하고 발랄해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앞둔 시인 지망생 ‘현실’ 통해
청춘의 현실 유쾌하게 표현한 영화

공모전 제출할 마지막 시 완성 위해
불편한 관계 친구·헤어진 남친 만나
현실에서, 사람들 속에서 탄생하는 시
‘시와 영화의 만남’ 청량하게 다가와

‘현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이 세계를 버틸 수 없음을 알기에 일단은 반려견 산책을 위해 축 늘어진 몸을 일으킨다. 오전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후 시간 동안 시(詩)만 생각하는 현실. 이제 곧 서른이 될 ‘현실’은 현실에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만, 세상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롭고 엉뚱한 영혼이다.

현재 현실은 문학상 공모전에 낼 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다섯 편의 시 중에서 마지막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해 무기력하다. 시를 잘 쓰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연락 두절이다. 시가 산으로 가니 등산화를 질끈 매고 진짜 산에 오르다가 현실의 첫사랑과 바람난 옛 친구 ‘주영’을 만나는 어색한 상황과 마주한다. 피하고 싶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둘은 함께 정상에 올라 옛 기억을 떠올린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서 난처하다.

첫사랑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등단까지 먼저 한 주영과 어설픈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 현실의 마음이 좋을 리 만무하다. 답답한 마음에 오랜 친구 ‘남희’를 불러내 낮술을 들이켜 보지만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술은 취했지만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기어코 시를 완성하겠다는 듯 현실은 카페로 가서 노트북을 켠다. 평소 인사만 주고받던 카페 알바생 ‘유정’이 시에 관심을 보이고, 두 사람은 술김에 아니 시로 인해 절친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시를 쓸 수 없자 현실은 자신을 버린 전 남친 ‘민구’를 만나야만 마지막 시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레 민구에게 이별의 이유를 묻지만 그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이별의 이유가 어찌 하나뿐이겠는가. 또 이별의 이유를 두 사람도 이미 잊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정쩡하게 이별을 한 둘은 이제 진짜 결별을 받아들이고, 현실은 그토록 바라던 마지막 시를 완성한다.

청춘들은 냉정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선택해야만 한다. 이때 현실은 꿈을 향해 돌진하는 명랑만화 속 인물 같다. 현실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이 들 수 있지만,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이때 영화는 가볍지만 진지하게 현실에게 ‘시 쓰기’란 무엇인지 전달한다. 현실은 시를 쓰기 위해 무기력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이 아니다. 시가 쓰이지 않을수록 밖으로 나간다. 케케묵은 관계를 정리하고, 어색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자신의 곁에 있는 이와 시간을 보낸다. 즉 ‘현실’의 시는 현실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시는 현실이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로 낭송되기에 이른다.

영화 위로 보이스 오버되는 시들은 황인찬 시인의 작품이다. 다섯 편의 시는 우아하고 철학적이지만, 문자가 주는 언어적 아름다움이 영상으로 모두 표현되기엔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의 여름’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는 비현실적인 인물 ‘현실’을 통해 시와 영상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을 느끼게끔 한다. 시와 영화의 만남은 아름답고 청량해서 자꾸만 읽고,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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