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부부보다 애틋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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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남사예담촌

계절의 변화를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라는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 주차장 바닥도 며칠째 이어진 가을비 탓에 촉촉하게 젖어 있다. 아예 앞을 못 볼 폭우는 아니어서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마을을 ‘가을비 우산 속’에 돌아다니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지리산 길목 옛 담장 예쁜 전통 한옥마을
백의종군 이순신 장군 유숙한 ‘이사재’
300년 향나무가 효심 지켜본 ‘사효재’
좁은 골목 구부러진 ‘부부 회화나무’ 압권
황홀한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간 착각


■최씨고가에서 이사재까지

남사예담촌은 지리산 입구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은 전통 한옥마을이다. 예담이라는 이름은 ‘옛 담’이라는 뜻이다. 옛 담으로 이뤄진 골목이 예쁘고 정갈한 마을이어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

주차장 입구 화단에 보라색 맥문동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지난달 경북 성주까지 가서도 보지 못한 맥문동을 뜻밖에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검은 기와와 갈색 진흙 담벼락 아래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예쁜 꽃은 가을비가 반갑고 즐거운 모양이다.

주차장 왼쪽으로 담쟁이넝쿨이 담벼락을 뒤덮은 골목을 따라 걸어간다. 입을 한껏 벌리고 아주 다정하게 웃고 있는 대문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전통적인 남부 지방의 사대부 한옥인 ‘최씨고가’다. 차분한 느낌을 가진 안채 앞에는 적어도 100년은 된 것 같은 향나무 한 그루가 고고하게 버티고 서 있다. 마치 집을 둘러보려면 허락을 받으라며 팔짱을 끼고 있는 주인이라도 된 듯하다.

최씨고가에서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가면 옛 담장 골목이 이어진다. 잠시 시간여행을 즐기라는 듯 아주 이색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흘러 넘친다. 골목 안쪽으로 이어지는 담장 아래에는 새빨간 맨드라미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가지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맨드라미와 귓속말을 소근소근 나누고 있다.

담쟁이넝쿨이 주렁주렁 매달린 옛담 골목을 빠져나오자 남사천이 마을 바깥쪽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다. 개울 맞은편에는 짧지만 제법 운치가 흐르는 산책로가 보인다. 초포동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산책로 입구인 하트 모양 꽃길터널이 나타난다. 꽃길터널을 지나면 남사천과 낮은 언덕 숲길 사이를 지나가는 산책로인 남사예담길이 나타난다. 얼마나 오래 관리를 안 했는지 먼지만 자욱하게 낀 안내판은 꼴불견이지만 산책로만큼은 제법 걸어볼 만하다.

남사예담길 끝에는 1597년 6월 1일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를 만나러 합천으로 가던 길에 유숙했다는 ‘이사재’가 나타난다. 밤새 비가 내리는데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이사재 마루에 잠시 앉아보려 했더니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 붓는다. 비도 피할 겸 할 수 없이 마루에서 한참이나 쉴 수밖에 없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따라 개구리만 처량하게 개굴개굴 울어댄다. 이순신 장군은 그날 밤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효재에서 사양정사까지

이사재에서 남사천을 건너는 이사교를 건너 사효재로 걸어간다. 1706년에 지은 사효재는 ‘효를 생각한다’는 이름에 걸맞게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대신 받은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건물이다. 사효재 마당 한쪽 구석에는 둥지가 비비 꼬인 향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사효재를 지을 때에도 이미 자라고 있던 나무라고 하니 수령이 최소한 300년 이상 되는 셈이다.

사효재를 지나 큰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유명한 옛 담 골목이 나온다.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오래 된 이씨고가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골목은 전국의 유명한 사진사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 촬영하러 왔다는 부부 회화나무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정성을 다해 찍으면 ‘인생 샷’ 한 장 정도는 만들 수 있기에 다른 것은 모두 제쳐두고라도 여기서 사진을 찍기 위해 남사예담촌을 찾는 관광객이 넘쳐날 정도다.

부부 회화나무 두 그루 중 왼쪽 나무는 하늘로 뻗어 있고, 오른쪽은 1m 정도 높이에서 구부러져 있다. 그래서 두 나무는 마치 손가락을 건 것처럼 ‘X’ 모양을 이루고 있다. ‘부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런 모양 덕분이다. 안내판에는 ‘두 나무는 서로 햇빛을 잘 받게 해 주려고 몸을 구부렸다’고 적혀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같은 내용이다.

갈색 황토로 만든 고풍스러운 담장과 담쟁이넝쿨 그리고 푸른 이끼가 잔뜩 낀 나무 두 그루가 좁은 골목에서 연출하는 독특한 풍경은 굳이 사진이 아니더라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기에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마치 황홀한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간 착각마저 느끼게 할 정도다.

부부 회화나무뿐 아니라 이씨고가도 매우 이색적인 형태를 가진 고택이다. 1700년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300년을 넘은 건물이다. 좁은 대문을 지나가면 곧바로 널따란 마당이 나온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붉은 색 굴뚝이 눈에 확 띈다. 굴뚝 바로 뒤에는 커다란 안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옛날에는 안채 마루에 앉은 ‘바깥양반’이 하인들에게 오늘 할 일을 일러주었을 것이다. 안채 옆을 돌아가면 다시 너른 마당이 나오고, 안채 맞은편에 또 다른 안채처럼 생긴 사랑채가 나온다.

이씨고가에서 나와 주차장을 지나가면 사양정사로 가는 골목길이 이어진다. 사양정사는 자식을 교육시키고 손님을 접대하던 건물이었다. 이곳에는 수령 120년이 넘은 배롱나무가 마당 한쪽구석에서 조용히 집을 지키고 있다.

사양정사 맞은편 하씨고가 뒤뜰에는 수령이 무려 600년을 넘었다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감나무라고 하는데 감나무를 직접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감나무가 아니라 마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신성한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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