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유·민주주의 모델의 수명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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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그 미국이 아니다/안병진

바이든 시대가 열리자 일각에서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흥분을 고조시키는 스릴러 장르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을 보면 과거와 다른 낯선 미국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상식과 전통의 바이든이 왔지만, 최근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미국은 우리가 알던 그 미국이 아니다.

‘새로운 이행기’ 시작, 3가지 세력 주목
‘토크빌·헌팅턴·데브스주의’로 규정
새 경계선 설정 위한 세 세력 쟁투 전망
한국, 이념 넘어 ‘전환적 리더십’ 필요


지금까지 세계 민주주의의 기준이자 기둥으로 우뚝 선 미국 의사당이 전직 대통령의 선동에 따라 미국 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점거된 건 좋은 예이다. 이것만 봐도 미국판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를 보는 것 같다.

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미국의 모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미국을 새롭게 규정하려는 세 정치에 주목한다. 저자는 미국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모델의 수명은 끝났다고 본다.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걸출한 발명 이후 업데이트만으로는 혁신이 가능한 시점을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미국은 ‘새로운 이행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이행기를 규정하는 세력은 기존의 미국적 가치와 경계선을 지키려는 ‘토크빌주의’, 체제를 넘어 문명 충돌적 시각에서 미국을 변화시키려는 ‘헌팅턴주의’, 안정성과 엘리트적 관리를 넘어 민중의 힘에 기반해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데브스주의’다. 저자는 이들 세 세력의 주요 특징을 얘기하고, 이를 대표할 수 있는 전략가와 정치가를 각각 한 명씩 제시하면서 미국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한다.

먼저 토크빌주의는 매디슨, 해밀턴 등 미(美) 건국의 아버지가 세운 주류적 가치와 제도의 경계선을 지키면서, 더욱 내구성 있고 탄력 있게 강화하려는 세력을 일컫는다. 이 세력은 미국적 가치의 건강성을 예찬한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지금까지 미국을 지탱해왔다. 따라서 미국의 현 시스템을 긍정하는 점진주의 세력이다. 토크빌주의자는 무엇보다 미국 헌법에 녹아 있는 건국 정신을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공화주의적 가치를 존중하는 만큼 정치를 적대적 투쟁의 공간이 아닌 선의의 경쟁과 통합으로 바라본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적 가치를 미국 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닌,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 미국의 힘과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다. 저자는 토크빌주의를 구현할 인물로 존 아이켄베리와 카멀라 해리스를 꼽는다.

헌팅턴주의자는 미 안팎 타자의 문명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고자 한다. 이 세력의 이름은 대표적인 문명충돌론자 새뮤얼 헌팅턴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주목할 점은 헌팅턴주의자가 말하는 타자는 비단 국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히스패닉, 아시안 등 이질적 문명의 미국 내 공동체 ‘침입’을 동등한 위험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치즘, 파시즘, 초기 네오콘과 친화성을 가진다. 또한 음모론, 가짜뉴스 등을 이용해 기존 워싱턴 주류의 문제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교묘하게 활용함으로써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다. 또한 백인 문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연대와 패권적 문명 질서를 구축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중국을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헌팅턴주의의 대표자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트럼프의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을 꼽는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정면 대결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운동가인 유진 데브스의 이름을 빌려 데브스주의라 일컫는다. 데브스주의는 미국의 매디슨, 해밀턴적인 자유주의적 건립 정신, 즉 토크빌주의를 데브스 스타일의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하려는 세력이다. 데브스주의는 공동체가 창출하고 생산한 것들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합의를 중시한다. 토크빌주의가 기존의 주류적 전통에 기초한다면, 데브스주의는 진보적 공화주의 흐름이다. 토크빌주의보다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포퓰리즘 전략을 추구한다. 여기엔 노동자 계급에 기초한 계급 운동뿐만 아니라 범민중 반기득권 운동이 뒤섞여 있다. 저자는 데브스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엘리자베스 워런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OC)를 꼽는다.

저자는 앞으로 이행기에는 전혀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기 위한 세 세력 간 쟁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이낄까? 저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세 세력 간 전투 양상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 것은 확실하다”면서 “지금 미국의 정치 세력들은 이 삼자 간에 서로에 대한 무지, 불안, 혐오, 오해, 순진한 희망 등이 섞여 비틀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기존 주류인 토크빌주의 경계선 안에서 안전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세 정치 세력의 각축전이 오늘날 미국 정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될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나 더. 미국이 흔들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이정표는 어느 방향으로 세워야 할까. 저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지구적 전환의 물결 속에서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기존의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전환적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전환이란, 열린 생각과 가슴과 의지를 갖고 미래의 틈새를 여는 것을 지칭한다. 안병진 지음/메디치/268쪽/1만 6000원.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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