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시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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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1964~2021)

나의 삶이 죽음 근처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시간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찬란했던 한 생애를 찰나에 마감할 때도

떫디떫은 울음 끝에 매달린 홍매화

붉은 꽃망울처럼 많이는 울지 말아야지

얘야, 꽃잎에 매달린 지난겨울, 깊은 밤

못다 핀 중얼거림이 나무 뼛속까지 스며드는구나

갈라진 바위의 전설이 숨어 있는

천 개의 문을 지나 그가 오고 있단다

혀가 잘린 네 어미의 말(言)들이

매화나무 가지마다 주저리

주저리 붉은 향기로 열렸구나

기억이 사라진 집의 뿌리를

찾아, 자작나무 우거진 숲

얼음의 땅을 찾아

그가 멀리 떠나고 있단다

-시집 (2013)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기도 하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과도한 집착이 이해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글을 적어 보내는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아무것도 없는 죽음 이후에 시인은 말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달한다. 시인이 이전에 적었던 글은 죽음 이후에 새로운 의미로 전해온다. 죽음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또 모든 것을 말해준다. 육체의 질병이 영혼을 맑게 만드는 것일까? 육체의 지난한 고통을 겪었던 시인의 생전의 시를 읽으며 그의 맑았던 미소가 떠오른다.

며칠 전 다른 문인들과 회의를 하다가 시인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먹먹한 가슴으로 이 글을 쓴다. 시인의 푸른 영혼은 이제 페루와 자카르타의 바닷가를 떠나 어느 낯선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주위에 연락도 없이 생을 마감한 시인에게 작은 인사를 보낸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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