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테드 휴즈와 젠더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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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신록의 계절인 오월에 산에 가면 연두와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며칠 전 날씨가 화창해 울산 울주군 가지산(加智山)에 다녀왔다. 가지산은 원래 석남산(石南山)이었는데, 1674년에 석남사가 중건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해발 1241미터 높이로 영남 알프스 최고봉인데 여러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신라 흥덕왕 때 전라도 보림사의 ‘가지선사’가 와서 석남사를 지었다는 설도 있고, 까치의 이두식 표기인 ‘가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의류 가운데 등산복과 골프복 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그만큼 주말에 등산하거나 골프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 한국인들이 등산복을 선호해 여행 패션을 바꾸자는 말도 있었다. 4월부터 주말에 근교의 산을 오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의 내면에는 무슨 욕망이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등산을 선호하지 않았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지겹고 힘들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 툭 트인 산의 정경이 주는 시원한 쾌감은 크지만 내려오는 길도 쉽지 않다.

등산 집착 남성 심리 속 내밀한 정복욕
자연 회귀 열망, 세상살이 패배의 반영
남성들 그릇된 선민의식 사회 곳곳 여전
각종 위력 업은 젠더 폭력 은밀히 작동

그래서 주말에 혼자 밀린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불 빨래나 청소 등을 하면서 주중에 못한 일을 처리한다. 사실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남성들은 주말에 집에서 쉬거나 가족과 외식 혹은 운동하면서 쉬지만 다수의 직장 여성과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여성들은 온전히 쉬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사회적 여건이 수월하지 않은 탓이다. 물론 과감하게 주말을 쉬기로 작정한 여성도 있지만, 다수는 여전히 자녀 교육이나 가사 노동에 매여 있는 편이다.

등산에 집착하는 남성의 심리에는 정복욕이나 타자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내재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들의 내면에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억압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이 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긴장을 적절히 해소하기 위해 등산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압박감을 해소하려는 무의식이 있다. 경쟁에서 승리해야 생존이 가능한 사회 분위기와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 MBN TV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 투영되어 있다. 2012년 8월 22일 첫 방송 이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최장수 프로이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중년 남성의 심리는 복잡 미묘하다. 특히 사회적 중추로 자리 잡은 그들의 윤리 의식이나 삶의 태도가 21세기의 변화된 세계관과는 이질성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사건들이 젊은 세대의 가치와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엘리트 혹은 선민의식이 미묘한 사회적 갈등을 가져온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젠더 폭력의 문제이다. 변화된 성적 가치관이나 젠더 개념이 체화되지 않는 중년 남성들의 태도가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 지형이나 문화 전반에 큰 이슈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성 가장이 주인공이며 주인이라는 의식이 아직도 사적인 영역에서 강하게 작동한다. 근절되지 않는 십대 소녀들의 성매매라든지 외도 산업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남성성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과 그것을 강화시키는 집단 분위기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남성의 성욕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자 본능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젠더 폭력은 은밀하게 여러 상황에서 작동된다.

테드 휴즈(Ted Hughes)가 쓴 ‘홰에 앉은 매(Hawk Roosting)’라는 시에는 그러한 젠더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본능과 권력 욕구를 탐색할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매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전지전능한 하느님처럼 만물 위에 군림하는 포즈를 취한다. ‘날아올라 아주 서서히 삼라만상을 회전시킨다-/ 나는 죽인다 마음 내키면 모두 내 것이기에./ 내 몸에는 전혀 궤변이 없다./ 내 방식은 먹잇감의 대가리를 산산이 찢어버리는 것-.’ 이 구절에서 보듯 매는 그 어떠한 논쟁이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계엄령을 집행하는 독재자처럼 보인다. 마치 절대 왕정의 군주처럼 생사여탈권을 지닌 것 같다. 사냥할 때를 주시하는 매는 절대적 주권을 가진 ‘법’ 그 자체인 것처럼 다가온다.

테드 휴즈는 영국의 계관시인인데 그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이다. 매가 가진 동물적 주권을 표현하면서 법의 폭력성까지 꿰뚫는 시적 안목이 탁월한 시이다. 절대적 권력을 향유하고픈 인간의 무의식을 홰에 앉은 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젠더 폭력 역시 신체적 혹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타자를 착취할 때 언제든지 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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