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속(聖俗)의 분리’, 인류 문명 ‘사상 최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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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땀 성왕의 피 / 김상준

이번 주에는 판을 거듭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를 소개한다. <맹자의 땀 성왕의 피>는 김상준 경희대 교수가 쓴 것으로 2011년 처음 출간됐을 때 지식인 사회를 충격한 책이다. 10년 세월 속에서 이 책의 프리즘은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이 책의 면모를 ‘동아시아 유교문명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요약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 사상과 역사, 동서를 아우르는 통찰과 전망은 상당히 깊고 넓다. 부제는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이다.

초기 근대는 유럽에 고유한 게 아니라
유라시아 단위서 하나의 연동된 일체
종교혁명·주자학 부상, 인류사적 사건
한국 민주화 운동 뿌리는 ‘유교 문명’

책은 무엇보다 ‘서구적 근대’의 틀을 파기한다. 대신 중층근대론을 말하는데 이는 세계사를 새롭게 보는 틀이자 방법론이다. 원형근대성, 식민-피식민근대성, 지구근대성 등이 중첩돼 겹쳐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초기근대는 유럽에 고유한 게 아니라 중국 인도 터키 등 유라시아 단위에서 하나의 연동된 일체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사 전체를 거대하게 조망한다. 먼저 인류 문명에는 칼 야스퍼스가 말한 ‘기축문명’처럼 보편적인 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문명 등이다. 공자, 플라톤, 석가모니의 시대가 얼추 비슷하다. 인류는 그때 범시대적으로 공유하는 초월성 세계성 윤리종교 윤리철학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근대는 무엇인가. 기축문명의 내용성이 바뀌는 ‘성속(聖俗)의 통섭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세계사를 통찰할 때 시대구분에서 '앞'과 '뒤'가 있다. 성이 속을 ‘통괄적으로 포섭(통섭)’하던 시대에서 속이 성을 통섭하는 시대로 이행해왔다는 것이다. 그 이행이 ‘근대’로의 전환이다. 인류사의 '앞'은 성속이 엉켜있었고, 그 '뒤'는 성속이 떨어졌다. 성속의 분리는 인류문명을 앞뒤로 나누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인류사 전환의 시발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성속의 통섭 전도였다.”

그런 차원에서 유럽의 16세기 종교혁명과 중국의 12세기 이후 송원(宋元) 연간의 주자학 부상은 인류사적인 사건이었다. 근대(초기근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도 상당히 발전했고, 세습귀족 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신흥 계급이 대두됐다. 자세히 보면 동아시아가 훨씬 빠르다. 이는 세계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무슨 말인가. 서양이 기독교문명이라면 동아시아는 유교문명인데 이 유교문명이 아주 대단하다는 것이다. 서양을 앞질렀고, 특히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이룩한 저항과 헌신 정신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운동권 학생, 노동운동가였다. “한국의 위대했던 민주화 운동의 1960~1980년대 30년간 시민들은 온통 저항에 나섰는데 그 저항과 헌신의 뿌리가 유교였다.”

그것은 유교가 두 개의 통(統)을 지녔기 때문이다. 성인의 계보인 ‘도통(道統)’과 군왕의 계보인 ‘왕통(王統)’이 그것이다. 왕권을 견제하는 전자가 왕권을 강화하는 후자를 압도하는 게 유교문명의 행로였다. 역사적 근대의 첫 여명기였던 송원 연간 사상계에 천년래(來)의 대사건이 일어난다. 천(天) 개념이 변한 것이었다. ‘도의 하늘(天卽道)’에서 ‘이치의 하늘(天則理)’로, 즉 주재자인 운명론적 하늘에서 법칙적인 하늘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유교문명에서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데카르트 이후 칸트에 이르는 사상적 전환이 동아시아에서 12세기 이후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전환이 고려-조선, 베트남, 나중에는 일본으로 파급됐는데 그중 가장 수준 높은 문치 국가에 이른 것이 후기 조선이었다. 도통권력이 군주권력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659년 예송 논쟁을 소모적인 붕당 논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교 국민국가의 태동’으로 본다. 이 책의 4장 ‘조선 후기 유교 근대의 다이내미즘’은 대단한 흡입력으로 읽힌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숨 막힌다. 17세기 중반 예송 논쟁은 세계사적으로 전무한 ‘고도한 담론 정치’을 행하면서 유교 정치를 전국화했고, 17세기 후반 예송의 파도는 전국 곳곳의 향전(鄕戰)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온 나라 양반 되기’와 마침내 동학의 봉기와 혁명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유교적 맥락에서 국민국가-근대주권-대중사회-인민주권의 역사를 발라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민주화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 알려진 유교’가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교’를 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김상준 지음/아카넷/644쪽/2만 5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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