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스트와 박스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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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디지털미디어부 뉴콘텐츠팀장

첫 경험은 강렬하다. 기자들에겐 수습기자 시절, 이름 석 자가 들어간 첫 기사가 그렇다. 대개 데스크가 뜯어고친 1단짜리 단신이지만, 본인들에겐 톱기사보다 커 보인다. 내겐 다른 의미로 강렬한 첫 번째 기사가 있다. 2009년 여름 막 수습 딱지를 뗀 뒤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쓴 일제강제징용자의 인터뷰다. “당시에는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어요. 주워듣기로 일장기와 다르다고 해서 빨간 동그라미 아랫부분을 검은색으로 칠했어요.” 1945년 8월 15일 여느 날처럼 일본 제련소에서 작업을 하다, 영문도 모른 채 광복을 맞은 조 모 씨의 증언. 리드도 없고 야마(핵심)도 흐릿한, 데스크가 보기엔 기사 같지 않은 기사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별다른 수정 없이 지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 기자, 기사 잘 읽었어요. 이야기처럼 술술 읽혀서 좋더라.” 다음날 기자실에서 만난 타사 선배의 한마디가 강렬하게 귀에 꽂혔다. 이야기처럼 읽히는 기사.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내 인생 첫 번째 ‘스토리텔링 기사’였던 셈이다.

‘스토리텔링 기사’ 강렬한 첫 경험
이후 지면용 정형화된 글쓰기 굳어져
다른 가능성 보여준 ‘체헐리즘’의 성공
‘다른 걸음’의 원동력은 독자로부터

아쉽게도 이후 비슷한 기사를 쓰지 못했다. 수습기자와 사회부를 거치며 ‘스트레이트(스트)’와 ‘박스(해설)’ 둘 중 하나로 기사를 쓰는 정형화된 기자로 다듬어졌다. 수많은 사건사고와 다양한 사람을 만났지만, 글은 늘 같았다. 스트 혹은 박스. 수습기자 제도에 대해 여러 시각이 있지만, 내부자 입장에선 꼭 필요한 통과의례다. 지면 제작의 필수인 스트와 박스, 기사 글쓰기의 기본기를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에 많은 정보를 담아내려면 중요한 팩트를 앞세우는 ‘역피라미드’ 방식의 스트레이트 기사가 가장 효율적이다. 못 다한 이야기나 인터뷰 기사는 박스(해설)로 풀어낸다. 수습기자의 거친 문장과 어수선한 구성은 데스크와 선배의 혹독한 가르침 속에 전형적인 기사체로 다듬어진다.

그런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스트와 박스가 문제다. 2009년의 기자와 2021년의 기자는 다른데, 기사 스타일은 스트와 박스 그대로다. 기사가 그대로니 신문도 바뀔 리 만무하다. 2009년 5월 27일 자와 2021년 5월 27일 자 신문의 1면 기사. 날짜만 바꾸면 어떤 게 오늘 자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가장 안 바뀐 걸 꼽자면 신문지면이 아닐까.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오로지 스트와 박스, 두 유형으로 풀어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종이에서 웹으로, 웹에서 모바일로, 뉴스와 정보를 접하는 경로가 바뀌면서 신문지면은 갈수록 독자의 눈길에서 멀어지고 있다. 1년, 한 달,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독자의 마음을 향해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가겠다는 건 소신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언론사들은 알게 모르게 스트와 박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써왔다. 인터랙티브 뉴스, 디지털 스토리텔링, 데이터 저널리즘 등 크게 주목받진 못해도 멀어지고 있는 독자의 눈길 손길 발길 되돌리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곳곳에서 작은 희망도 보인다. 일례로, 소외된 이웃의 삶을 직접 체험한 뒤 기사로 풀어낸 ‘남기자의 체헐리즘’은 꽤 알려진 뉴스 연재물이다. 연재 3년 만에 남형도 기자는 대한민국 기자 중 가장 많은 5만 명 가까운 네이버 구독자를 모았다. 얼마 전부턴 구독료를 받아 사연의 주인공에게 기부하는 ‘소소소설(소외되었지만 소중한 이들을 위한 소설)’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체헐리즘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언론의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진지한 기사 따윈 외면하고 가십거리만 좇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언제든 돌아올 준비가 돼 있다.

도 새로운 기사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지난해 부산 사투리로 지역의 이야기를 풀어낸 ‘사투리뉴스’에 이어 올해는 ‘자는 남자, 걷는 여자’를 선보였다. ‘자는 남자’는 김준용 기자가 이슈 현장에서 낮잠을 자며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코너다. 첫 편으로 비행기 소음 피해에 시달리는 김해공항 근처 딴치마을을 찾아 ‘잠’입취재를 시도했다. ‘걷는 여자’ 서유리 기자는 산복도로 계단이나 오르막길 등 부산의 역사가 스민 장소를 걸으며 주민들의 사연을 담아냈다. 조회수가 많게는 몇 만에 이르는 편도 있지만, 들인 공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표다.

그럼에도 가야 할 방향이라 믿는다. 소설과 기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사 같지 않은 기사를 처음 써본 후배들. 고생만 하다 소리 소문 없이 시즌1을 마무리했지만 강렬한 첫 경험으로 남았길 바란다. 스트와 박스 너머, 다른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은 독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부디 잘 자라고... 열심히 걸으라고... 관심 하나, 응원 한마디 보태주시라. 묵묵히 ‘기레기의 시절’을 견디고 있을 전국의 김 기자, 서 기자들이 시즌2, 시즌3를 선보일 수 있도록!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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