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116) 선을 긋고 지우고… 신체 가동 범위 내 드로잉, 이건용 ‘달팽이 걸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붉은 바탕 위 푸른 수직선들의 위를 지우며 가로지르는 긴 흔적. 이 작품은 2019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조명전 두 번째 전시 ‘이건용-이어진 삶’ 당시 시민을 대상으로 했던 이건용 작가의 현장 퍼포먼스 결과물이다.

‘달팽이 걸음’은 작가의 ‘이벤트-로지컬’의 대표작으로, 40년 전 1979년 제15회 상파울로 국제비엔날레(상파울로현대미술관, 브라질)에서 처음 발표했으며 그 이후 중요한 전시 때마다 이 퍼포먼스를 실행해 오고 있다.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는 작가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긴 합판 위에 쪼그려 앉아 물감이 묻은 붓으로 팔길이 만큼 좌우로 선을 그리며 전진한다. 작가의 두 맨발은 그 물감 선을 지우면서 뒤를 따른다. 신체의 가동 범위 내에서 그림의 가장 초보적인 선을 긋고 지워나가는 동작을 반복해 보여주는 작가의 독특한 ‘신체 드로잉’은 퍼포먼스로 표현한 시대성과 깨어있는 작가 정신의 산출물이다.

한국 아방가르드(전위예술) 1세대 작가인 이건용은 1970년대부터 50여 차례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는 달팽이 걸음을 하거나, 건빵을 먹거나, 테이프를 자르고 잇거나, 나이를 세거나 하는 단순해 보이는 행동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비틀어 표현했다. 그가 신체와 언어, 사물, 장소, 관계 등을 화두로 펼친 퍼포먼스만 해도 50여개에 이른다.

감시와 검열이 심각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급기야 작가는 1975년 퍼포먼스 ‘이리 오너라, 내가 보이느냐’로 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는 군부독재라는 당시 제한된 상황에서 작가로서 느끼는 표현의 한계를 보여주는 몸짓이자 억압 받는 자의 생존 흔적이다.

1979년 상파울로 국제비엔날레 이후 40년 넘게 이어진 그의 ‘달팽이 걸음’은 주어진 장소에서 달팽이처럼 대지와 하나가 되어 전진해 나아간다. ‘시대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행위자’로서 거창한 예술적 행위라기보다 일상적 행위인 신체 드로잉을 통해 예술과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김지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