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층을 위한 디지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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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배운 디지털 터치가 안 무섭다

‘인터넷뱅킹을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쇼핑을 할 수 있다. 배달앱을 이용할 수 있다. 지도앱으로 복잡한 곳을 걸어서 갈 수 있다.…’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농구선수 출신 방송인 허재는 후배들의 ‘디지털 문명 테스트’에 하나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우리 나이로 57세인 그가 무인 식당에서 키오스크로 라면을 주문하면서 노안으로 메뉴를 간신히 고르고 카드 꽂을 곳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은 ‘디지털 문명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예능’이 됐다.


고령층 디지털정보화 수준 가장 낮아
단순 불편함 넘어 손해 보는 상황 발생
일회성 교육 아닌 체계적 과정 필요
일자리·여가 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디지털은 웰에이징 위한 필수 도구
정부·기업, 디지털 교육 적극 나서야


■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

고령층은 디지털정보화 4대 취약계층 중에서도 최약자다. 2020년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령층(50대 이상)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68.6%로, 저소득층(95.1%), 장애인(81.3%), 농어민(77.3%)보다 현저하게 낮다. 구체적으로 보면 접근 수준은 92.8%로 높지만 역량(이용 능력)에서 50%대(53.7%)로 떨어진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만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거나 파일을 전송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 의미다.

“스마트폰 국내 출시가 2010년이었으니 10년 좀 지났는데 중장년층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 스마트폰이 내 손에 들려 있고 스마트폰이 아니면 기차표도 못 끊는 세상이 된 거죠. 아래 세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서투를 수 있어요.” 협동조합 따뜻한 디지털 세상의 정재동 대표의 말이다. 집단 내 격차도 크다. 연령별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50대(99.2%), 60대(78.8%), 70대 이상(38.8%) 순으로 벌어진다. 독거가구는 부부가구와 자녀나 손자와 함께 사는 2, 3세대 가구 노인보다 디지털 활용도가 뚝 떨어진다.

문제는 디지털을 모르면 일상 생활에 어려움이나 피해를 겪는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정 대표는 와이파이나 금융 서비스를 예로 든다. 공짜 와이파이를 연결하는 법을 모르면 데이터요금을 물고, 은행 지점을 방문하면 앱에서는 공짜인 수수료까지 내면서 송금을 해야 한다. 특히 코로나19로 비대면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장노년층의 소외는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지난해 소비자원은 70대 이상 5명의 키오스크 이용 모습을 관찰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전원이, 버스터미널에서는 3명이 영어나 조작 방법을 몰라 이용을 포기했다.



■교육은 필수, 그다음은?

“식물 좋아하는 분들은 모야모, 중고물품 파시려면 당근마켓, 이제 기억이 좀 나시죠?” 지난 25일, 부산대 해양공학관 강의실에서는 부산대 평생교육원의 ‘중장년을 위한 알기쉬운 스마트폰 활용’ 강의 12회차 수업이 진행됐다. 이날 수업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유튜브 크리에이터 기초’였지만, 지난 주 배운 앱 활용 내용 복습이 20분 동안 이어졌다. 정재동 대표가 강의하고 이수자 강사는 수강생들 옆에서 앱 설치나 막히는 점 등을 도왔다. 배워도 금세 잊어버리고, 개인별로 수준 차이가 큰 장노년층의 특징을 반영한 방식이다.

이춘자(64) 씨는 매주 경남 양산에서 남편과 함께 오는 모범생이다. 해외 자유여행을 꽤 다녔는데 스마트폰을 알면 편할 것 같아서 신청했다. “지도 앱으로 맛집 찾고 렌즈 앱으로 메뉴판 찍으면 해석해서 보여주는 걸 배웠는데, 코로나 끝나면 어서 써보고 싶어요. 아, 구글플레이스토어에서 앱 받는 걸 배운 게 첫 번째로 유용했고요.” 지난 주에는 당근마켓을 배운 뒤 가족 가게의 안 쓰는 마네킹을 직접 올려봤다.

“장노년층은 보통 기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걱정 말라, 고장 안 난다’고 말해주고 자꾸 만져보고 또래 강사에게 편하게 질문할 수 있는 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정 대표는 “용어가 낯설어도 처음 설정 수업에서 글자 키우기 같은 기본 기능을 배우고 나면 스마트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면서 “장노년층일수록 일회성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7년부터 노인 정보화 교육을 운영한 노인생활과학연구소 한동희 소장은 ‘교육 그 다음’을 강조한다.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걸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이메일을 배우더라도 메일 주고받을 일이 없으면 잊어버리는 거죠.” 한 소장에 따르면 ‘그 다음’은 일자리가 될 수도 있고, 여가나 커뮤니티 활동이 될 수도 있다.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처음 디지털을 접한 80대는 아파트 단지에서 다른 장노년층을 가르치는 ‘인터넷 내비게이터’로 활동하면서 연구소 촬영 봉사도 거뜬히 해낸다. 연구소의 ‘마음의 영양소 노인 교구’ 지도사 커뮤니티에는 활동 내용을 직접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올리는 60대 지도사들도 여럿이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도록

특히 고령화 시대에 디지털은 제2의 일자리를 포함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퇴직 이후에도 살아온 만큼의 인생이 남는데, 아직도 정부나 장노년층 스스로나 ‘디지털이 뭐 필요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디지털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노인들의 생활에 들어와야 합니다.” 한 소장에 따르면 디지털은 병원 예약부터 독거노인을 위한 사물인터넷 기반 홈서비스, 돌봄을 비롯한 다양한 복지 서비스 신청까지 오히려 고령층에게 더 필수적인 도구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노인 정책이나 부산시나 사회복지기관 같은 지역 자원도 디지털 교육과 연계해 재편되거나 개발될 필요가 있다.

기업도 나서야 한다. 키오스크부터 온라인 결제 시스템까지 고령층이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고려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사용자 환경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용자에게 이롭다. 그러나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19년 조사에서 무인정보단말기 정보접근성 수준은 평균 59.82점에 불과했다. 스마트폰 제조사 등 디지털기업도 디지털 교육에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한 소장은 지적했다.

김숙자(74) 씨는 예순에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해 그래픽 자격증을 땄고, 지금도 복지관과 아파트에서 포토샵을 가르친다. 수강생 중에는 그보다 한참 어린 50대 주부도 있고, 퇴직 후 자격증에 도전하는 60대도 있다. “나이 들고는 살림하고 목욕탕에 앉아서 놀다 오는 게 다였는데 컴퓨터를 배우고 내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스스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고 내 일을 하면서 가족들한테도 인정 받고요.”

한동희 소장은 “디지털이 노인에게는 필요없는 기술이 아니라 건강하고 활력있게 잘 나이드는 웰에이징을 위한 필수 도구라는 점을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노인도 예외 없이 디지털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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