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에스프레소 / 김종미(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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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면서 다급히 돌아보는 눈길에

눈이 내린다

바람 한 점 없이 오직 중력의 힘으로만 내리는 눈은

어느 청각 장애자의 눈에 비친 당신의 입술이다

눈이 쌓인 그 자리는

꽃을 사랑하여 몸서리치게 쓸쓸해진 꽃그늘의 무덤

바람 한 점 없는 십초가

너의 장례였으니

이 겨울 나의 슬픔은

짧고도

뜨겁고도

쓰디 쓴 블랙홀

사랑은 언제나 그랬다



- 시집 (2013) 중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후유증으로 아파하는 데 삶의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모든 사랑은 객체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서 오는 통증은 사랑받은 객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주체가 만들어가는 자의식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생명체인 사람은 성장하면서 여러 형태의 인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게 된다. 사랑받는 객체의 여러 가지 인성 중에서, 사랑하는 주체인 우리의 자의식이 깨달을 수 있는 부분만 사랑하면서 지내오다가 객체의 다른 인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사랑은 고통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주체는 객체가 변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프다고 착각한다. 사랑하고 아파하는 과정은 상대방의 여러 인성을 깨달아가는 자의식의 발달 과정이다. 그래서 자의식이 충만한 헌신적인 사랑에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받아들여야 한다. 쓰디쓴 에스프레소처럼.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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