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에서 액체 사회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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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 시대에서 ‘호모 센수스(Homo Sensus)’ 시대로 바뀌었어요. 근대가 논리의 시대라면 현대는 이미지와 감성의 시대라는 거죠. 현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호모 센수스, 즉 온몸 지각의 고감도 인간을 상정해요.” 대중문화 비평집 (신생)을 낸 평론가 권유리야(사진·56) 부산외대 교수는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는 ‘확정된 하나’가 없는 사회”라며 “대신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모든 다자가 자유롭게 연결돼 세계는 늘 새롭게 생성 중”이라고 했다. 그런 세계를 읽는 것이 ‘플랫폼 리터러시’이며, 고정된 단단한 것이 없는 우리 시대는 ‘액체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좀 어렵다?

평론가 권유리야 대중문화비평서 2권 출간
어수선한 ‘라디오스타’는 떠도는 유희 상징

TV 프로그램 예를 보자. ‘라디오 스타’는 다수 사회자가 다수 출연자와 어수선하게 떠드는 프로그램 같다. 상당한 의미가 숨어 있다. 스토리 라인 없이 애초부터 맥락을 설정하지 않은 완전개방형 구조로, 이들의 토크는 삶이나 감동이 아니라 사건이나 유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현실의 본질에 육박하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힘 빼고 현실의 겉면을 유동하는 유희로 나아간다는 거다. MBC ‘수익 효자’ 프로그램이라는 ‘놀면 뭐하니?’도 각본이 있는 게 아니라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선택이 이어지는 방식이다. “정해진 룰이 없고 무한대의 텍스트가 창조 융합 해체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탄생이 이어지는 것이 유동하는 현대의 양상입니다.” 이런 데서 유동성의 사회, 액체 사회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그는 “인류 문명사는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실재’를 잃어온 과정”이라고 말한다. 3차원 ‘조각’에서 2차원 ‘벽화’, 1차원 ‘문자’를 지나서 이제 디지털 사회의 0차원 ‘픽셀’에 이르러 실재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잡으려면 없는 것, 확정할 수 없는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원리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거 같다.

그런 시대에 통하는 것이 ‘액체 교양’이다. TV ‘수요미식회’ ‘알쓸신잡’이 보여준 것으로, 쉽게 주제 이동하면서 견고한 모든 경계를 녹여버리지만 각각의 세부는 상당히 정교한 고감도의 교양으로 대학 교육에서도 ‘액체 교양’이 얘기되고 있다고 한다.

액체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대중문화 관점의 ‘고양이, 공적 폭력의 사적 이전’이란 글이 눈에 띈다. “대도시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는 곳이에요. 그런 대도시가 억누르고 있는 야만성을 사적으로 해소하는 감정 장치가 고양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야만성을 숨기고 사는데 고양이가 대도시 사람들의 살해 욕구에 자꾸 노출된다는 거예요. 억압의 출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대도시를 유지 존속시키는 비공식적 제도의 하나”라는 것이다. ‘먹방’ ‘ 귀여움’ ‘여행’ ‘할배’ 등도 대중문화 비평으로 읽고 있다. 권 평론가는 ‘웹진 문화 다’ 등에 발표한 20편의 톡톡 튀는 글을 모은 평론집 (포엠포엠)도 출간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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