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생각’하며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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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 출근길. 습관처럼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마침 이날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이었다. 하필이면 며칠째 계속된 비로 날은 흐렸고, 앵커가 전하는 소식도 잿빛처럼 먹먹했다. 한 인터뷰에서 멈칫했다. 2013년 제1회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 미얀마 대표로 참가한 미스 미얀마 타 텟 텟 씨가 연결됐다. 그는 지금 반군부 무장단체에서 총을 들고 군사훈련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라디오 특성상 한국어 통역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배경음처럼 간간이 들려오는 타 텟 텟 씨의 목소리는 의연했다. 되레 통역을 맡은 미얀마 유학생이나 청취자인 내가 울컥했다.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미스 미얀마’
두렵지만 ‘생각하는 국민’으로 당연

5·18 가해자 계엄군 다룬 영화 보며
“생각 없음이 낳은 악” 비극 떠올려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사는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소중한 가치 상실


그는 왜 총을 들었을까. 그만큼 절박했던 것 같다. “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혼자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집에만 있다면 언제든 우리 집에 군부가 쳐들어와서 체포할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해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합법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 않은 군부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게 “국민의 의미(혹시 의무는 아닐까?)”라고 힘주어 말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생각’한다라는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왜 그에게 강한 연민과 연대 의식을 가졌을까. 한참 동안 생각했다. 내가 미스 미얀마, 타 텟 텟 씨 인터뷰에서 감동한 지점은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한다는 의미일 테고, 결과까지 책임지는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미얀마처럼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라 더 존경심이 들었다.

물론 반대 입장에 놓인 사람도 적지 않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지난 12일 개봉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감독 이정국)를 보면서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의 비극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5·18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계엄군 출신 대리기사 ‘오채근’(안성기 분)이다. 1980년 5월의 광주, 그때 그곳에서 채근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거리에 나온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심지어 교련복을 입은 고교생을 총으로 쏜 뒤 암매장했다. 채근은 그때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때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왕년의 투 스타’ 박 회장, ‘박기준’(박근형)은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린다. 채근이 박 회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편히 잘살 수 있었는지…” 박 회장은 말한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때 일은 다 역사가 평가해 줄 거야”라고.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표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렸다. “생각 없음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과 무엇이 다를까.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주시킨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한 시민이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저질렀다. 아무 생각 없이 상관의 혹은 상부의 지시나 명령을 무조건 충실히 이행했다고 악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그 지시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던 1980년으로부터 41년이 지난 2021년, 또다시 봄이 돌아왔지만 그때의 진실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책임자 처벌 또한 완료되지 않았다. 수백 명에 이르는 행방불명자의 소재도 찾지 못했다. 비록 영화를 통해서이지만 반성 없는 세상에 대한 채근의 사죄와 복수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 대사 “악행에 대한 고백은 선행의 시작”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그대로인 셈이다. 영화 소품으로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나 고야 판화집 ‘카프리초스’에 나오는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작품을 애써 배치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나치 정권이 몰락하고 전체주의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도 아렌트의 섬뜩한 경고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해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너무 바빠서, 혹은 문제가 복잡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습관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지 않으려면 결코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고 강조한 아렌트의 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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