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또 하나의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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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내서재 대표

2년 전 여름, 나의 소아시아 기행에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터키 소도시 뎀레(Demre)의 해변에서 개기월식을 보았다. 개기일식이건 개기월식이건 개기식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코로나, 곧 광환(光環) 내지 달무리다. 일 년이 넘도록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전염병 코로나도 바로 이런 모양을 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때만 해도 약 5개월 후에 코로나라 불리는 전염병의 대유행이 있게 될 것임을, 그의 시 작품 중 ‘죽음의 푸가’ 정도만 알고 있던 파울 첼란이 ‘코로나’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시 ‘코로나’를 쓴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
나치가 지배하고 그들이 쓰는 독일어로
평생 글을 써야 하는 작가로서의 고통
이를 견뎌 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데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 시인에 관해 어떤 식으로건 글을 쓰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한계상황 같은 것 말이다. 최근에 내가 읽는 책들과 보는 그림들과 듣는 음악들이 하나같이 파울 첼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루지야 출신의 작곡가 기야 칸첼리, 독일의 전후 미술작가 안젤름 키퍼, 아도르노, 그리고 심지어 하이데거까지 이 시인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광복절을 일본 땅에서 보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유월절(유대교의 3대 축일 중 하나)을 애굽 땅에서 지낼 때의 느낌과 비슷할까?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 이후 전 생애 동안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보내왔을 것이다. 물론 이건 비유적 표현이다. 여기서 이집트는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그들이 쓰는 독일어이고, 유월절은 그 독일어로 쓰는, 잊지 않기 위해 고발하기 위해 그 이집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는 시다. 이런 기이한 모순을 나에게 상기한 사람은 첼란이 한때의 연인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잉에보르크 바흐만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놓치지 않고 민감하게 주목한 아감벤이었다. 첼란은 ‘코로나’를 바흐만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에세이 에 수록된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이라는 글에서 파울 첼란이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시인으로서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순적인 상황에 주목하고,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집트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 모든 곳(파리, 런던, 체로노비츠, 예루살렘)이 집이나 다름없는 첼란이 이집트에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보내야 한다는 모순.’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파울 첼란이 유대인 시인으로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한 불가능한 과제다. 그리고 아감벤은 예민하게 감지했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놓쳐 버린 이 불가능한 과제가 바로 첼란에게 삶의 공간뿐만 아니라 그의 시 공간을 확보해 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부모님과 공동체를 파괴한 살해자들이 쓰는 것과 똑같은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 이것은 수십 년 전에 카프카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직면해야 하는 딜레마에 관해 토로한 바 있는 세 가지의 불가능(글을 쓰지 않는 것의 불가능, 독일어로 글을 쓰는 것의 불가능, 다르게 글을 쓰는 것의 불가능)을 고통스럽게 실행하는 것과 같다. 놀라운 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첼란은 이 소름 끼치는 모순을 자신의 시작(詩作)을 위한 지렛목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다른 생존자들은 독일어를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하여 침묵하거나 유럽을 떠나 이스라엘로 가 버리거나 히브리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첼란은 계속해서 독일어로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시인은 모어 속에서만 자기 자신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다. 외국어 속에서 시인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독일어는 어머니가 남겨 준 모어였다. 루마니아 시민으로 태어났고 1955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첼란은 바흐만을 만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6개월 남짓 되는 짧은 체류를 제외하면 공식 언어가 독일어인 나라에서 거주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독일어로 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에 첼란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시인으로 하여금 글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가 유대인이고 그의 시어가 독일어일지라도 말이다.”

1920년 루마니아 부코비나의 주도 체로노비츠에서 정통 유대인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난 첼란.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모든 유대인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또 하나의 이름, 즉 유대의 이름을 얻는데, 첼란이 얻은 유대 이름은 유월절이라는 뜻의 페자흐(Pesach)였다. ‘코로나’가 수록된 시집은 . 첼란이 유년 시절을 보낸 부코비나에서 안식일과 유월절 같은 유대 축제일에 먹던 빵에는 양귀비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1970년 4월 20일, 그러니까 유월절 축제 기간 중에 파리의 센 강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첼란은 수영에 능했지만 다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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