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귀멸의 칼날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지난해 11월 2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전집중의 호흡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관료와 의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물론이다. ‘전집중 호흡’은 만화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말로, 주인공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할 때 읊조리는 호흡법을 가리킨다. 총리라는 사람이, 그것도 공식 국회 답변 중에 이런 표현을 뱉었으니 만화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게 된다.

2016년 만화책으로 시작한 ‘귀멸의 칼날’의 인기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영화로까지 이어진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는 일본 영화의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다. 그동안 부동의 1위를 지키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아성을 20년 만에 무너뜨린 것이다. 극장판 성공은 죽어 가던 일본 출판만화 시장도 살려 냈다. 식인 도깨비에게 가족을 잃은 주인공이 도깨비로 변한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려고 벌이는 사투를 그린 이 만화는 사실 단순한 스토리다. 하지만 ‘가족애’ ‘우정’ ‘자기 성장’ ‘노력’이라는 보편적인 코드가 공감대 확장에 기여했다. 거기에다 개인에서 가족 전체로 수요를 넓히는 마케팅, 굿즈 판매나 관련 서비스 시장 따위를 활용한 상술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팬덤이 형성된 것이다.

한국 열풍 역시 예사롭지 않다. 지난 16일, 극장판 영화가 개봉 110일 만에 국내 관객 200만 명을 불러 모았다. 이달 초 단행본 만화 완결판은 4주 연속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다. 왜색 문화가 짙고 잔혹한 장면이 많은 데다 욱일기 문양 논란까지 빚었는데도 2030세대와 여성들은 이 만화에 열광한다. 경직된 한·일 관계, 기성세대의 반일 감정과 일제 불매운동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다.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는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의 힘과 생각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나는 내 책무를 다할 것이다. 여기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아!” 지금은 우직한 ‘멸사봉공’의 이런 대사가 통하는 난관의 시절이다. 무기력에 빠진 인간이 위기에 굴하지 않고 마침내 이겨 내고야 말리라는 의지가 만화라는 극단적 표현 매체와 만나 공감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귀멸의 칼날’은 코로나19의 또 다른 역설이다. 왜색 논란에만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다른 국가 혹은 타인들의 감정과 심리적 요소를 어떻게 파악하고 그들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이 낯선 신드롬을 수용할 필요가 있겠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