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현금 나눠주는 국가, 이렇게 쉬운 행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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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녕 경제부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경쟁력은 2류”라는 1995년의 발언이 4반세기가 지난 현재 더욱 뼈아픈 일갈로 와닿는다. 그 ‘옛날’의 발언이 어찌그리 한치의 오차없이 지금의 시대에 그렇게 적확하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

20세기 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알아왔던 경제상식이 최근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정부가 현금을 국민에게 나눠주는 행정을 보편화하면서부터다. 더욱이 내년 대통령선거에 나서겠다는 정치인들이 경쟁하듯 현금을 나눠주겠다고 한다. 그 금액도 수십만 원 단위의 코로나19 지원금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국민에 거액, 대선주자 경쟁
단위도 수천만, 수억 원 달해
경제 논리에 맞나 의구심 커

재원 마련 실패 땐 국민이 피해
기업·부자 타깃 징세 논란도
경제상식 맞는 정치·행정 절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세계여행비 1000만 원을 주겠다는 대선주자가 있는가 하면 사회초년생에 1억 원 통장을, 전 국민에게 평생 200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대선 주자도 있다. 군가산점 대신 3000만 원을 주겠다는 이도 있다. 이미 수십만 원의 현금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국민에게 이제 수천만 원, 수억 원 정도는 줘야 약발이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경제에 깊은 지식은 없지만 상식선의 경제 지식은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쉽게 정부가 국민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는데 지금까지 국민은 왜 그렇게 ‘개고생’을 하며 돈을 벌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허경영 국가혁명당 총재가 2007년 대선 당시 1억 원의 결혼수당과 3000만 원의 출산수당을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미친 것 아니냐’고 비웃은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현금을 나눠주는 국가운영 방식에 대한 의문은 사실 지난해 코로나19 재난지원금 때부터 강하게 들었다. 돈을 나눠줘 경제를 살리겠다는 여당의 주장에 대해 ‘미친 것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초창기 비난하던 야당이 지지율이 떨어지자 돌연 ‘더 빨리 더 많이’ 나눠줘야 한다고 ‘콜’을 부르니 도대체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경제분야 공직자들 역시 처음에 반대를 하다가 정치권이 강하게 나오니 순순히 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쯤되니 그간 경제 원리를 한참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쉽게 국가가 국민의 돈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데 왜 지금껏 그런 방식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찔끔찔끔 나눠주지 말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도록 전 국민에게 5억 원 정도 나눠주면 어떨까? 아니 1인당 10억 원 정도 나눠주면 최고로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 재원은 없는 것인가? 누구도 현금을 나눠주자면서도 재원 마련에 대해선 별 얘기가 없어서 어느 정도 돈을 나눠줄 수 있을지 알 길이 없다. 세계여행비 1000만 원이나 사회초년생에게 1억 원의 통장을 자신있게 나눠줄 정도면 정치인·행정가들이 좀 더 노력한다면 수억씩 나눠주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이긴 하다.

국가가 돈을 나눠줘서 국민이 쓰게 하고 개인과 가정이 소비를 한 만큼 다시 국가 경제가 살아날 것이란 논리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통장에 돈이 들어와야 쓸 수 있는 건 개인이나 가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도 나눠주려면 돈을 거둬야 하는데 그것이 세금일 것이고, 세금을 내는 이들도 세금을 낼 여유가 있어야 국가 곳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세금을 내는 이들이 누구며 그들의 경제사정이 어떤가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점이다. ‘나눠주고-쓰고-벌고-세금내고’ 하는 순환구조 중 어느 한 곳이라도 펑크가 나면 무척 곤란해질 것 같다. 정부가 아니라 결국 국민이.

자영업자를 비롯한 서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이 지급됐지만 서민경제는 한계에 달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장 오늘(16일) 들리는 뉴스만 해도 단순노무 종사자의 4월 증가폭이 통계청의 통계가 나온 이후 최대폭의 증가라고 한다. 그 중 과반은 60세 이상 고령층이다. 일자리의 상당부분이 고령층의 단순노무직 종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순환구조의 한 축을 맡아야 할 취업자들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자영업자 절반 이상이 고용여력이 없으며,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 40% 정도가 폐업을 고려할 정도의 한계상황이란 소식도 있다.

현금을 나눠줄 만큼 세금을 거둬가야 할 곳은 이제 기업이나 그야말로 상위 몇%에 드는 부자들 밖에 없어보인다. 원래 이들이 타깃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들의 주머니 사정 역시 국가 경제를 버텨낼 만큼 충분한지 알 길이 없다. 세금에 대한 원성이 자자한 이 시국에 어떤 비책이 있을지 정치인 그리고 행정가들에게 묻고 싶다.

4류 정치에 3류 행정이 따라가니 기업경쟁력이 2류에 머무는 것 아닌가? 대선이 코앞이다. 경제상식에 맞는 정치와 행정이 절실한 시점이다. jumpjum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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