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그분이 바로 ‘나’… 그게 부처님 오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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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영일 스님 법어

19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경남 양산 영축산은 날카로운 부리, 매서운 눈의 독수리가 날개를 거대하게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독수리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1982년 출가해 통도사 강사와 2015~2019년 유나(선방의 주지)를 지낸 영일(66) 스님은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독수리가 노리는바, 부처님 오신 뜻이다. 영일 스님은 수행승으로 이름이 높다. 지난 33년 동안 한 번도 거름 없이 66번의 안거 수행을 했다. 안거는 각각 3달간의 하안거·동안거를 말한다.

“부처는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그 너머로 가라”


“생각이 문제다. 선 수행에서 몰입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멈추는 것이다. 화두 참구가 제대로 되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화두만 돌아간다. 화두 자체가 스스로 의심을 일으켜 생각이 없는 상태가 쭉 된다. 내가 어느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때가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는 상태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아니다. 그 생각 너머 본성, ‘참나’에 직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에서 ‘정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들도 보통 화두 길 잡는 데 5년이 걸린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넘볼 수 없는 것 아닌가. 다만 자기 전 10분간이라도 고요히 정좌해서 하루를 반성하면 참 좋다고 한다. 그러면 밤새 잠자면서도 수행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과연 10분으로 5년의 벽을 부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분이지 본성을 창제하신 분은 아니다. 석가는 2500년 전에 있었던 분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와 동시에 살고 있다. 그분은 바로 ‘나’이어야 한다. 그분과 ‘나’가 따로 있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깨달은 그분이 바로 나’라는 아찔한 진실이 부처님 오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평등하게 완벽하다. 무지렁이 중생도 부처와 똑같이 온전히 다 갖추고 있다. 모두 위대한 존재다. 하지만 부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 나에게도 갖춰져 있구나, 내가 완벽한 존재구나, 라고 확인해야 나는 위대한 존재다.” 스님은 서강대를 졸업하고 독일어 교사가 되기 바로 직전에 홀연히 출가했다고 한다. 그런 이력을 물으니 스님은 “그때의 나를 잊었다”고 했다.

“우리는 늘 과거에 얽매이고 미래를 걱정한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있다고 굳게 생각할 뿐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횡(橫)으로 늘어서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오직 현재에 종(縱)으로 다 있을 뿐이다. 당면하는 이 자리가 진실이다.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의 부처’가 아니라 항상 ‘지금의 나’가 핵심이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 지금이 부처님 오신 날인 것이다.

-삶은 만만찮은 것이다. 그러한 삶의 경험 속에서 얻는 장삼이사의 깨침과, 수행승의 깨침이 크게 다른 것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활 속에서 얻는 삶의 깨침은 사유를 바꾸는 것이고 불교의 깨침은 사유가 싹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유라도 그것은 잡념이다. 생각과 사유로 얻는 지혜는 다 가짜다. 생각, 사유의 세계는 진리가 아니다.”(여기서 일어나는 저마다의 의문과 깨침은 저마다의 몫일 것이다.)

스님은 통도사에서 출가해서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강사 생활을 했고 곧바로 참선 수행을 하고 싶어 제방으로 나아가 17년 만에 통도사에 다시 왔었다. 그리고 10여 년을 통도사에 머물고 있는데 그것도 눌러앉은 게 아니라 매번 안거 철이 오면 전국 곳곳의 선방을 찾아 수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스님은 “선방 이외에는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오대산 해발 1500m의 높고 청정한 북대암 기운을 말했다.

인터뷰 중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치고 닦는 것도 마친다)와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아도 계속 닦아야 한다), 그리고 중도(中道)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돈오돈수는 ‘천하 대장부는 바로 깨치면 성불이야’라는 포효가 들어 있는 것이다. 화려하고 과격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역대 조사들은 돈오점수의 입장이었다. 돈수냐 점수냐 이전에 무엇보다 얼핏 깨쳐서 도인을 자처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는 가짜 도인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중도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다. 참 나를 실현하는, 참 나로 들어가는, 참 나를 드러내는 바른길이 중도다.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

불교계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스님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여겨 잘 묻지를 않는다. 외려 자기를 내놓고 바짝 엎드리는 불자들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런 점이 읽힌다. 첫째 지금은 스님들이 점검할 선지식이 이전에 비해 별로 없다는 것이고, 둘째 스님들이 얻어낼 것이 많은 질문거리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가 큰일 났다.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코로나19 시대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전염병 시대에는 특히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야 한다. 모든 존재의 행복을 축원해야 한다. 항상 불심을 가지고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존재에 대한 외경을 실천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는 어렵다. 그러나 코로나가 또 다른 경험을 주면서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는 게 참회다.”

등불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나. 우리는 그것을 찾는데 그게 이미 우리 안에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바야흐로 영축산 독수리가 날아오르고 있다.

글·사진=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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