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남으로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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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신대 총장

십 년 전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리에 있는 예수원으로부터 특강 초청을 받았다. 1965년 미국 성공회의 대천덕 신부가 설립한 이 수도원이 인근의 하사미 분교를 인수하여 ‘생명의 강 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하면서 개교 기념 강연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교명이 왜 하필 ‘생명의 강’인가를 들어 보니 거기에는 학교 설립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학교 인근 예수원의 목장이 있는 곳이 세 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삼수령(三水嶺)이었다. 이곳에 빗물이 떨어지면 한 방울은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또 한 방울은 서쪽으로 가 한강을 만들며 마지막 방울은 동쪽 방향으로 튀면서 오십천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독 북쪽만 없는데 북한 지역으로 네 번째 강인 ‘생명의 강’이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한 인재 양육의 취지로, 그 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강이 끝나는 자리에 형성되는 포구
‘남포’는 옛 시문에 주로 이별 장소
부산 남포동, 상봉의 공간 거듭나길

자연의 강은 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러시아의 레나강이나 예니세이강,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강들도 그러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강들이 남으로 흐른다. 인류 최고 문명지였던 메소포타미아를 만들고 있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인도의 인더스와 갠지스가 남향이며 우리의 낙동강과 섬진강도 다 남쪽 바다로 들어간다.

강이 끝나는 자리에는 포구가 형성되고 도시나 바닷가 마을이 생성되기 마련이다. 남으로 흐르는 강들이다 보니 그런 포구들도 한결같이 남포(南浦)인 셈이다. 항구 마을들인 남포는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어촌이면서 동시에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는 상봉과 별리의 장소였다. ‘남포로 돌아가는 길이 나그네 마음 설레게 하네(南浦歸撓動容情)’라는 시구에서 상촌 신흠은 남포를 귀향이나 만남의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옛 시문학에서 남포는 ‘송군남포(送君南浦)’나 ‘별군남포(別君南浦)’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 대부분 벗이나 연인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굳이 남쪽의 항구가 아니더라도 별리가 일어나는 곳은 그곳이 동정호 변이나 양자강 둑이든, 대동강 기슭이나 두만강 나루터이든 어디나 다 남포였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로, 북서부는 거친 산악과 준령의 고원이고 남방은 강이 흐르고 많은 호수들이 산재한 광활한 평원이다. 북서쪽은 말이나 마차가, 동남방은 배가 전형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전통적 작별시를 보면, 북서 지역 감숙성에 머물던 두보가 육로로 떠나는 벗에게 ‘그대 말을 타고 홀로 성을 떠나네(鞍馬去孤城)’라고 말을 도입하는 반면, 남방 시인들은 배가 출항하는 포구인 ‘남포’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저 초나라의 굴원은 ‘사랑하는 임을 남포에서 떠나보내네(送美人兮南浦)’라고 노래했고, 서라벌 저잣거리에서까지 시문이 매매될 정도로 신라인들에게도 인기였던 백거이는 ‘남포에서의 서글픈 이별(南浦凄凄別)’이라고 읊조렸다.

그런데 낙엽 지는 가을이 이별의 계절로 인식되어 왔듯이 백거이나 ‘추별남포(秋別南浦)’를 읊은 맹교는 가을날의 이별을 읊었지만, 한·중의 많은 문인들이 한결같이 봄날의 별리를 작시했다. ‘봄풀은 푸른빛/ 봄 강은 초록 물결/ 그대 남포에서 보내니/ 이 슬픔 어이 하나(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라는 남조 문인 강엄의 시나, ‘강 위로 매화는 무수히 떨어지는데/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이 마음 달랠 길 없어라(江上梅花無數落, 送君南浦不勝情)’라는 당대 시인 무원형의 시구가 이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송나라의 왕백도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데, 아! 나는 남포에서 임과 헤어지는구나(春風初開兮別君南浦)’라고 슬퍼했다. 어디 그뿐이랴. 고려의 정지상도 ‘비 갠 긴 둑엔 풀색 짙은데/ 임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 흐르네(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라고 봄철의 이별을 노래했다.

이렇게 가을보다 봄날의 별리에 대한 작품들이 많은 것은 봄철에는 얼었던 호수가 녹고 강이 풀리므로 겨우내 발이 묶였던 배가 다니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길 떠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별을 맞이하던 시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봄빛은 저렇게 찬란하고 봄 내음은 이렇게 향기로운데, 임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 것인가.

그러고 보니 우리 부산에도 ‘남포’가 있다.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 만남의 약속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가 남포동이지만 문학 속의 남포는 이제 보니 만남의 공간이라기보다는 별리의 장소인 셈이다. 북적이는 거리마다 속닥대는 골목마다 만남의 꽃들이 피어나지만 남포동은 이별의 포구이다. 하나, 포구는 또한 떠난 임이 돌아오고 벗과 상봉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산은 설렘의 파도가 넘실대는 만남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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